“베스트셀러요?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남이 안 내는 책, 이건 누가 내도 내야 하는 책이다 하는 그런 책을 냈지, 돈벌이로 책 찍어 본 적은 없습니다.”
광복되던 해 섣달 초. 서른 넷의 정진숙은 제법 초겨울 태 나는 찬바람을 가르며 서울 종로 2가에 우뚝 선 영보빌딩 4층으로 들어섰다. 동일은행(지금 조흥은행) 행원 생활을 마감하고 “새로운 세상에서 보람된 일”을 하고 싶어 그렇게 차린 을유문화사가 1일로 창업 60년을 맞았다.
을유문화사는 실은 그가 앞장서 차린 출판사는 아니었다. 한국은행 총재를 지낸 민병도씨, 아동문학가 윤석중씨, 명편집자로 성가를 올리던 조풍연씨가 발기했고, 그들의 제안을 받아 워낙 살림이 능했던 그가 ‘살림꾼’이 되어 차린 해방둥이 출판사였다. 광복 이전에도 출판사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을유가 특별한 건 출판시장이란 것이 없다시피 했던 형편에서 우리 사전, 우리 역사를 다룬 책을 거의 처음으로, 그리고 제대로 냈다는 데 있다.
“지금까지 7,000종이 넘는 책을 냈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건 ‘큰 사전’을 낸 일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창업 직후, 사전을 내기로는 역량이 태부족이던 출판사에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을 모시고 이극노, 김병제 선생이 찾아와 “누구 하나 이 사전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 우리나라가 해방된 의의가 어디 있단 말이오? 그래 이 원고를 가지고 일본 놈들한테나 찾아가서 사정해야 옳겠소?” 하고 따졌다. 일이 이쯤 되자 숙의에 숙의를 거듭한 을유문화사 경영ㆍ편집진이 과감하게도 출판을 결정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울 수도 있지만, 일제 때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법정증거물로 압수되었다가 광복 직후 서울역 운송회사 창고에서 발견된 이 원고를 출판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종이와 납 활자 문제였다. “신문을 마분지 같은 데 찍어내던 시절이었으니 사전 낼 종이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심지어 미국의 록펠러 재단 지원까지 받아가며 10년이 넘게 걸려 6권 짜리 ‘조선말 큰사전’을 결국 내고야 말았습니다.”
그때까지 일본 글자가 다수이던 인쇄소의 납 활자를 이때 온전하게 우리말로 바꾸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진단학회와 손잡고 65년에 우리 통사인 ‘한국사’를 낸 것도 을유문화사의 큰 업적이다.
고령에다 몇 해 전 위암 수술을 받았지만 지금도 그는 매일 오전 9시쯤 60년대 옮긴 서울 종로구 수송동 사옥에 출근해서 오후까지 사무실을 지킨다. 눈이 어두워 신문ㆍ잡지를 보는 정도로 소일하는 그가 제일 아쉬워하는 것은 지금은 “전후좌우가 없다”는 것이다. “한때는 매일 20~30명이 이 사무실을 북적거렸는데 지금은 하루종일 앉아 있어 봐야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날 경기 파주 출판도시에서는 을유문화사 창사 60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잔치가 열렸다.
민음사, 범우사, 문예출판사, 지식산업사, 열화당, 동서문화사, 한길사, 웅진닷컴, 창조사, 현대문학, 일조각 등 내로다 하는 후배 출판사들이 참여한 ‘을유문화사 화갑 기념 준비위원회’가 주관한 자리다. 이날부터 18일까지 파주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에서는 을유문화사의 60년을 되돌아보는 전시회도 열린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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