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 잘하세요”라는 말이 유행이다. 우리의 ‘친절한 금자씨’ 덕분에 날개를 달았지만, 그 말은 이전부터 사용되어왔다. 유행어의 사회심리학은 과잉 분석을 수반하게 마련이라는 점에 대해 독자들의 이해를 구하면서 상상의 날개를 펴보기로 하자.
왜 “너나 잘해”가 아니라 “너나 잘하세요”일까? 이는 조언이나 평가를 해주는 이가 형편없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적 기준에서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라는 걸 시사한다. 조금 더 나아가자면, 이른바 ‘명분’을 갖춘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누군가 나에게 명분을 갖춰 훈계 또는 계몽을 시도한다.
대충 보아 말 되는 말인 것 같아 대뜸 “너나 잘해”라고 쏴주기는 어렵다. 그런데 내심 영 같잖다는 생각이 든다. 말을 하는 사람의 자격이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일종의 타협책으로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하게 된 건 아닐까?
●편가르기 문화가 낳은 유행어
어느 논리학 교재를 보건 ‘발생론적 오류’라는 게 나온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에 묻은 때에 시비를 건다면 그게 바로 발생론적 오류다. 어떤 텍스트(말과 글) 자체를 평가하지 않고 텍스트를 발생시킨(생산한) 사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게 과연 오류일까? 논리학에서만 오류일 뿐이다. 현실세계에선 그건 오류라고 하지 않는다. 특히 당파적 대결 구도가 형성된 상황에선 ‘오류’가 아니라 ‘진리’처럼 여겨진다.
똑같은 말이라도 누가 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대접을 받는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그것이 반대편에서 나온 말이라면 그건 틀린 말이 된다. 말이 안 되는 말이라도 우리 편의 대장이 한 말이라면 그건 진리로 추앙되어야 한다.
이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의 ‘편 가르기’ 문화가 요구하는 기본 문법이다. ‘편 가르기’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편 가르기’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다. 문제는 무엇을 중심으로 편을 가르느냐는 데에 있다.
한국 ‘편 가르기’ 문화의 특성은 그것이 사람 중심이라는 데에 있다. 한국인들이 워낙 사람을 좋아하는 정(情)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갖게 된 문화이겠지만, 이는 공공적 차원에선 거의 재앙이다. 자기 성찰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너나 잘하세요”는 자기 성찰 없는 비판문화가 드센 한국사회를 향한 일침이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다. 예컨대, 내가 “너나 잘하세요”의 정신을 실천에 옮기고자 한다면, 나는 이런 종류의 칼럼을 쓸 수 없게 된다.
성찰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성찰에 투철해질수록 분노할 일은 사라지게 돼 있다. 이 세상에 이해 못 할 일은 없으며 매사에 너그러워진다.
극단적으로 말해 그렇다는 것이지만, 성찰에 투철한 사람이 조직의 강력한 리더가 되는 법이 거의 없다는 건 진리에 가깝다. 강력한 리더는 추종자들의 성찰 가능성을 차단하면서 자신이 제시한 노선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끔 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자성않는 사회’ 부작용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이타적 행위를 하는 집단에도 헤게모니 투쟁은 있게 마련이다. 바로 이런 인간적 속성도 성찰을 어렵게 만든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종교ㆍ봉사단체에서 자주 일어나는 치열한 내부 갈등을 이해할 길이 없어진다. 이런 집단에서의 갈등은 늘 해오던 대로 이타성으로 포장되기 때문에 해소가 더욱 어렵다.
“너나 잘하세요”는 늘 명분을 휘두르는 사람들에게 자기 성찰부터 먼저 하라는 주문이었겠지만, 유행어의 특성은 그 발생론적 기원을 배반한다는 데에 있다. 한국일보 이유식 논설위원이 지난 25일자 칼럼 ‘염치없는 시대를 사는 법’에서 잘 지적한 것처럼, 이제 그 말은 염치없는 사람들의 자기 방어용 비아냥으로도 쓰이고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잘하면 좋겠다.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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