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근갈근 목젖에서 하고픈 말이 끓어요. 꿍꿍 욱박아 두었던 말들이 배꼽노리로부터 불덩이처럼 치받아 올라요. 이제는 할 수 있을 거예요. 하고야 말 겁니다. 당신께 당신 없이 살아 낸 그악한 세월을 다 이야기하고 싶어요.” 노파가 하소연한다. 후줄근한 한복 아래, 호호할미의 야윈 어깨가 애처롭다.
그 여자, 윤석화는 객석을 일종의 의식 교란 상태로 몰고 간다. 꽃다운 15세에 단종의 비가 되고 나서 왕위 찬탈 등 온갖 세파를 가까스로 견뎌낸 82세 할미를 연기하는 그 몸짓과 말투는 극중 인물 정순황후에 완전히 복속된다. 같은 이치로, 관객에게 코앞에서 펼쳐지는 비통한 순간 순간은 극이 아니라 현실이 된다.
통한에 감염돼, 극중 인물과 배우를 분간 못 하는 착시 현상에 빠진 객석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염치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는 정도가 고작이다.
극단 산울림의 ‘영영이별 영이별’은 비운의 남편 단종을 보내고도 이후 왕이 다섯 명 바뀔 때까지 모진 목숨을 부지해 나간 정순황후의 일대기를 모노드라마로 만든 작품이다. 이미 몇몇 모노드라마에서 객석의 사랑을 확인한 윤석화이지만, 이번 것은 확연히 다르다. ‘목소리’, ‘딸에게 보내는 편지’ 등 앞서의 모노드라마에서 그는 욕망하는, 성숙한 현대 서양 여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모진 운명에 허청대는, 그럼에도 결국 운명을 초극해 내는 한국 여인이다. 일부함원(一婦含怨)의 현장과 일부종사(一夫從事)의 이데올로기를 피비린내 나는 왕실비사 속에 배치한 이 작품의 설득력은 배우의 연기에 의존한다.
무대에서 인상적인 것은 시청각적 장치다. 머리 장식만 3㎏ 나가는 왕비 대례복은 약과다. “달 밝은 밤에 자규새 울면….” 정순황후가 시름을 달래기 위해 읊는 시조창, 물기 빠진 몸짓으로 추는 살풀이 등 전통 예능은 이아미 등 젊은 국악인들로부터 달포 동안 전수 받은 결과다. 왕비의 궁중 대례복인 활옷과 한지의 이미지를 근간으로 한 배경 장치가 무대에 녹아든다.
이 연극은 잘 알려진 단종애사의 페미니즘 버전이다. 그 비장함, 그 고풍스러움을 1인극으로 되살려 낸 작업의 맨 앞에는 김별아가 쓴 같은 제목의 소설이 있다.
작가 전옥란은 맛있게 씹히는 말로 바꿨고, 윤석화는 몸을 던졌다. 세 여성이 각각 이룬 꼭지점을 아우른 사람이 연출가 임영웅씨. 대구에서 KTX를 타고 와서 봤다는 박동준(54ㆍ패션 디자이너)씨는 “단종과의 이별 대목은 숨 막힐 정도로 감동적이어서 나도 몰래 눈물이 복받쳤다”며 “윤석화씨의 변신이 놀라울 뿐”이라고 말했다.
연극은 복원된 청계천에 바쳐지는 무대이기도 하다. 청계천 다리 복원을 기념하기 위해 서울시가 벌인 공모전에 나온 소설이 원작이다. 청계천 복원 사업으로 갓 되살아 난 영도교(永渡橋)가 바로 17세 소년(단종)과 18세 소녀(정순황후)가 작별한 곳이다. 2006년 2월19일까지 산울림소극장. 수ㆍ금 오후 3시 7시30분, 목 7시30분, 토 3시 6시, 일 3시.(02)334-5915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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