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에 실시된 2005년 인구주택총조사(센서스)가 15일 마감됐다. 센서스에 들어간 돈은 무려 1,300억원에 달하며 이 중 800억원이 인건비에 사용됐다.
10만명의 조사원이 투입된 만큼, 방문조사를 둘러싼 재미있는 뒷얘기도 무성하다. “문 열어주는 집이 드물어 고생했다”는 부자 주택가와 “의외로 협조가 잘 됐다”는 외국인 노동자촌을 맡은 2명의 조사원에게서 보름간의 경험담을 들어보았다.
■ "빈집 많아 사람 구경 힘들었죠"
“돈 많은 분들은 몇 년씩 외국에 나가 살면서도 집을 세놓지 않고 그냥 비워둔다는 걸 이번에 참가하면서 처음 알았어요.”
전통적인 ‘고급 주택가’인 서울 평창동을 맡았던 임미영(40)씨의 가장 큰 고충은 사람 만나는 것 자체. “집과 집 사이 거리가 수백㎙씩 되는데다가 언덕도 어찌나 가파른지…. 그런데도 초인종을 누르면 답이 없는 집이 부지기수였어요. 문은 안 열어줄지언정 대답만 들려와도 반가울 정도였다니까요.”
임씨는 보름간 이 지역을 수십 차례 돌며 ‘부자 주택가’의 특징을 몇 가지 알게 됐다. 외국에 장기체류하는 집이 많다는 것, 외국에 나가 몇 년씩 머물더라도 세는 거의 안 준다는 점, 사람이 사는 집인지를 판단하는데 개 짖는 소리가 결정적 ‘단서’로 작용한다는 점 등이었다.
“저택에서 키우는 개 중에는 몸집이 아주 큰 녀석들이 많았어요. 한 마리 개가 짖기 시작하면 온 동네 개들이 일제히 짖어대 얼마나 난감하든지….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사람은 없고 개만 사는 집도 있다는 거예요. 빈집이 아닌 것처럼 보이려고 개를 집에 두면서 밥 주는 사람을 따로 고용한다니까요.”
작가, 연예인, 운동선수 등 텔레비전에서 본 유명인사가 직접 대문을 열어준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물론 많은 경우 파출부가 조사원을 맞았다. 인심 좋은 농촌에서는 때 되면 밥도 차려 준다는데, 부자 동네는 경계심 때문인지 음료수 한잔 건네는 경우도 흔하지 않았다. 어차피 주변에 큰 건물이 거의 없어 화장실 가기도 쉽지 않아 음료수도 자주 마실 형편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동료 조사원들이 한 마디 불평 없이 웃는 얼굴로 ‘거사’를 잘 끝마쳐 다행입니다. 가구 수에 따라 투입될 조사원 수가 결정되는데, 평창동 같은 고급 주택가는 집들이 멀리 떨어져있고 언덕이 많아 무척 힘든 편이에요. 앞으로는 이런 지역적 특성을 배려해 줬으면 좋겠어요.”
김신영 기자 ddalgi@hk.co.kr
■ "불법체류 부부 겁먹은 눈빛 생생"
"우리 말도 잘 못하면서 웃는 모습으로 조사에 응해줘 너무 고마웠어요."
유복자(44)씨가 맡은 지역은 경기 동두천시 보산동. 주한미군 상대의 술집에서 공연을 하며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보내는 필리핀 '연예인', 건설현장에서 일하며 하루하루를 근근이 연명하는 페루 노동자 등 힘겹게 사는 외국인이 많은 지역이다. 미군부대에 근무해 영어가 유창한 남편 이기섭(44)씨가 퇴근 후 김씨를 도왔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사는 곳은 주변 환경이 정말 열악했어요. 따뜻한 물은커녕 단칸방에서 취사와 취침을 모두 해결해야 하는 이들이 많았죠. 방 하나에 대여섯 명이 모여 사는 경우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입 열기를 가장 꺼렸던 이들은 불법 체류자들. 젊은 필리핀 부부는 허름한 철문 너머로 김씨를 두려운 듯 쳐다보며 끝내 자물쇠를 풀지 않았다. 한국말과 영어가 모두 서툰 이들에게 "이 조사는 단순히 자료를 위한 것이므로 체류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몇 차례 설득을 해야만 조심스레 조사에 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국말을 서툴게 배워 존댓말을 쓰지 못하는 젊은 이란 근로자도 기억에 남는다. "언제 태어나셨어요"라고 물으면 "1978년이야", "함께 사는 가족은 있으세요" 하면 "없어"라는 식이었다. 조사가 다 끝난 후 남편 이씨가 "내가 한참 형인 것 같은데 다음에 만나면 존댓말 써요"라며 빙그레 웃자, 그는 "알았어"라고 대답했다.
김씨는 미군부대 안에 있는 가산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만난 할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짠하다. 미군부대에서 잡부로 일하다 남편과 사별 후 홀로 지낸다는 김모(76) 할머니는 1998년 수해로 집이 다 떠내려간 후 컨테이너에서 농사를 지으며 근근이 살고 있었다.
"외로우셨는지 몇 마디 여쭙자마자 제 손을 잡고 우시더라고요. 힘겹게 살아오신 이야기를 하시는데 저도 마주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조사를 간신히 마치고 나오려는데 직접 농사지은 것이라며 고구마를 한 봉지 싸서 한사코 손에 들려주시는 거예요. 이처럼 어렵게 사시면서도 남을 챙겨주는 분들을 보니 힘이 절로 솟아 비교적 수월하게 조사활동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김신영 기자 ddalg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