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파는 1905~1908년 프랑스를 중심으로 대담한 색채의 모험을 시도했던 일군의 화가를 일컫는다. 기껏해야 3년 남짓의 짧은 기간, 그러나 미술사에 끼친영향력은 길고 심오하다.
선구자인 마티스(사진)가 "야수주의는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것의 시작이다"라고 말한 그대로 야수파는 20세기 최초의 예술적 혁명이었으며, 다다 이후 본격화하는 아방가르드 운동과도 맥이 닿는 현대미술의 출발점이었다.
야수파는 하늘과 대기, 수목에 선홍색을 사용하는 등 자유분방한 색채변형 실험을 통해 회화에 대한 전통적 인식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이들로 인해 색채는 외부세계의 재현 및 묘사라는 제한적 기능에서 벗어나, 예술가의 감동이나 사념을 표현하는 독자적 위상으로 격상됐다.
'눈앞에 있는 것을 그대로 그리기 위해소가 아니라 나 자신을 보다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색채를 사용한다'는 반고흐의 주장은 그대로 야수파의 신조가 됐다.
화폭을 색과 형으로 이루어진 자율적인 조형세계로 간주한 야수파의 입장은 외부세계의 충실한 재현과 아르누보적 우아함을 높이 사던 당대 미술계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때문에 마티스 등은 1905년 그랑팔레에서 열린 살롱 도톤느전에서 평론가 루이 보셀로부터 "야수들(fauves)'이라는 혹평을 들어야 했다. 야수파라는 명칭이 만들어진 유래다.
짧지만 강렬했던 야수파의 색채 향연은 주요화가들의 관심이 색채로부터 입체감, 양감, 선 등 구조적인 면으로 이행하면서 급속히 사그러 들었다.
야수파의 대표작가 중 한명이었던 브라크는 이후 피카소와함께 입체주의의 창시자가 됐고, 독일에서는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표현주의 미술이 태동했다.
드렝과 플라맹크, 뒤피 등 많은 작가들이 또 다른 변화의 흐름에 가담했으나 결코 야수파 활동때의 명성과 업적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다만 마티스만이 야수파의 본질을 끝까지 유지, 피카소등과 함께 20세기 미술의 거장 반열에 올랐다.
이성희 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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