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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냉전이 삼킨 도시로 속 예술가의 초상' 우리 시대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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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냉전이 삼킨 도시로 속 예술가의 초상' 우리 시대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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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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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라는 작가가 있다. 사유의 깊이와 표현의 정치함으로 독자를 일거에 압도하는 작가. 은근히 전이하는 시적 울림의 문장으로 독자를 오래 흔들어놓는 작가. 그 마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독자가 있다면, 둘 중의 한 부류일 공산이 크다. 책이라는 물건에 도통 관심이 없거나, 사는 것 자체에 시큰둥하거나.

해가 바뀌면 여든 살이 되는 영국 출신의 이 노작가는, 젊어서 그림과 미술평론으로 업(業)을 시작해서 사진 다큐멘터리 등 시각예술 분야 전반에 걸쳐 글을 썼다.

진보적이고 비판적이며 명쾌한 사회사상가로 이름을 날렸고 국내에는 사진비평가이자 에세이스트로 먼저 알려졌지만, 그는 “로렌스 이후 양심의 명령에 따르는 책임감과 감각적인 세게에 대한 배려를 동시에 보여주는 데 있어 그 만큼 성공한 작가가 없었”(수잔 손탁)다는 평가에 너무나 합당한, 그리고 지난 해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이라는 신작 소설을 발표한 현역 작가다. 그가 30대(1958년)에 발표한 첫 소설 ‘우리 시대의 화가’(열화당)가 이제야 번역 출간됐다.

이야기는 붉은 군대의 탱크가 부다페스트에 진주해있던 1958년, 야노스 라빈이라는 영국 런던의 헝가리 출신 망명화가가 성공적인 개인전을 치르던 중 돌연 자취를 감추는 것으로 시작된다.

미술비평가이자 야노스의 친구인‘존’은 사건을 설명해줄 단서를 찾고자 스튜디오를 찾아가고, 스케치북에 헝가리어로 쓴 일기를 발견한다. “(그 일기는) 망명자로서의 예술가의 초상이라고 부를 만했고, 오늘날 어떤 면에서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망명자인 것이다.”(18쪽)

소설은, 사라지기 12일 전까지 써 내려간 친구의 일기 원문과, 그에 대한 존의 부연이 교차하며 이어진다.

-과거에는 내가 참여했던 중대한 사건의 맥락 속에서 나 자신을 인식했다. 그런데 이 한갓지고 복받은 나라에서 산 지난 십년 동안 내 삶은 평온했다. …이런 상태는 적절한 시간감각의 상실로 이어진다. 우리는 사건으로 시간을 재기 때문이다. …이 스케치북에서 나는 시간의 속도를 늦출 것이다.(야노스의 일기 첫 장)

-“섹스나 작업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게 있어.” 그(야노스)는 이렇게 말했다. “앞날에 대한 기대라는, 너무나 보편적인 인간의 필요 말이야. 인간에게서 미래를 빼앗는 건 그를 죽이는 것보다 더 가혹한 짓이야.”(존의 부연)

망명 전 이 화가에게는 아름다운 세상(사회주의)에의 이상을 공유한 친구들이 있었다. 동일한 갈망과 신념에도 불구하고 엇갈려버린 이들의 운명, 고독한 망명화가의 고통스러운 내면, 예술과 양심 그리고 신념과 삶이라는 질긴 길항과 견인의 자장 속에 휘청대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영혼의 힘…. 눈치 있는 독자라면 짐작하겠지만, 이 중심서사의 배경에는 소비에트의 헝가리 침공과 유럽 현대사의 질곡이, ‘메카시즘’이라는 단어 하나에 포섭되지 않는 냉전 이데올로기의 폭력성과 야수성이 깔려있다.

야노스가 왜 사라졌으며 어디로 떠났는가는 독자들이 그와 함께 아파하며 확인해야 할 일이다. 가난한 화가의 그림에 대한 열정, 그의 순정한 미학ㆍ철학적 가치관,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의 갈등과 고뇌 등 풍성한 곁 서사와 추리적 장치는 읽는 재미와 중층적인 감동을 선사한다.

작가는 책 머리에 막심 고리키의 문장을 옮겨놓고 있다. “삶은, 항상 뭔가 더 나은 것에 대한 갈망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만큼은 고될 것이다.” 그리고 1988년 후기에 이렇게 썼다.

“이 책에 담은 미래에 대한 희망 중 어떤 것들은 끝내 실현되지 않을지 모른다. 희망이라는 것이 종종 그렇듯이, 이 책의 성숙함은 현재를 단순화하려는 유혹을 고집스레 거부했다는 것, 가슴을 찢을 듯한 모순의 고통을 인정했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순연한 희망을 지켜냈다는 것에 있다”고.

영국 출간 한 달 만에 보수 평단의 공격으로 배포가 중단됐다가 7년 뒤에야 복간된 이 소설의 한국어판 서문에 작가는“이 책은 딜레마와 용기에 대한 책”이라고, “여러분이 읽음으로써 …그 딜레마와 용기에 저마다 원하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썼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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