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등단한 구경미씨의 첫 소설집이 나왔다. 제목이 ‘노는 인간’이다. 호모 루덴스(유희하는 인간)로서 고상하게 ‘노는’ 인간이 아니라, 계급론에서 말하는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곧 놈팡이들이다. 소설 속 대개의 인물들이 그런 부류들이다.
표제작의 ‘나’는 글 씁네 하면서 방에만 틀어박혀 사는, 그러면서도 딴에는 고뇌하며 “내 삶은 숙명적 피곤 그 자체”라고 말하는 소설가다. ‘나’는 지금 일주일 동안 3쪽 5줄 분량의 소설을 써놓고 이야기를 어떻게 어디로 끌고 갈지 진퇴양난에 빠져있다. 햇살 좋은 날, ‘나’는 슬며시 집을 나서 누가 어디서 주워놓은 듯한, 주위 어느 것과도 어울리지 않는, 집 앞 소파에 가 앉는다.
앉아서는 ‘작업실’을 올려다본다. “안은 보이지 않고 내 세계의 전부라는 것이 어두컴컴한 동공으로만 존재했다. 내가 저 속에 있었던 적이 정말 있었을까 의문이 들었다.… 믿어지지 않는 그 방에 앉아서 나는 늘 이 검은 소파를 탐냈다. 검은 소파가 아니라 검은 소파 위의 햇빛이 탐났다.”(13쪽)
‘나’에게 ‘소파’는 일종의 피난처다. 그곳은 필요 의지 질서 지시 규정 등이 강요하는 세상의 공인된 가치로부터 벗어난, 이를테면 가치의 해방구이자 잉여 공간이다. 거기서 바라본 ‘나’의 거처는 그 모든 공ㆍ사적 가치질서의 지배 하에 놓인 암흑의 억압 공간 아닌가. 소파를, 그리고 햇빛을 탐하는 것은 그 질서에서 이탈하고픈 충동이다.
심지어 늘 ‘노는 인간’으로 치부되는 ‘나’ 역시 그 질긴 세상의 질서에 묶여 끌려 다녔음을, 이중의 사슬에 묶여 사는 타인들은 얼마나 이해할까. 과연 ‘안 노는 인간’들은 그들을 옥죄고 있는 사슬의 억압을 얼마나 인식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깨어있는 자는 ‘노는 인간’인가 ‘안 노는 인간’인가. ‘못 노는 인간’은 정말 어찌할 수 없어 ‘못’ 노는 것인가, 혹시 외부의 시선이나 자신의 욕심 등에 연루된 모종의 자기억압 때문에 ‘안 노는’ 것은 아닐까.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그런 면이 있지 않을까.
소설집 10편의 작품 속 ‘노는 인간’들의 다양한 놂의 군무는, 창조의 유희처럼 고상하지는 않지만, 풍차로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기백처럼 단호하다. 그 항전은, 자못 유쾌하고 사뭇 신랄하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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