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과 낙엽이 진 세상은 온통 잿빛이다. 저 바랜 빛은 꽃피는 춘삼월까지 이어질 터이다. 이따금 눈이라도 오면 그나마 칙칙함을 가릴 수 있겠지만….
계절에 상관없이 늘 푸른 것이 있다. 소나무이다. 화려함이 모자라 늘 관심 밖이었겠지만 분명 공기 같은 존재임이 분명하다.
바로 지금이 소나무의 진가를 체감할 기회다. 이 잿빛 계절을 화사하게 해줄 여행 테마로 이보다 더 나은 게 있을까. 소설 ‘묵호를 아는가’의 어투를 잠시 빌리자. 준경묘(濬慶墓)를 아는가?
소나무 이야기를 하다가 뜬금 없이 무덤이냐고? 보지 않고는 모른다. 묘 주위를 뒤덮은 소나무 숲, 그 낙락장송이 얼마나 멋들어져 있는지.
환경 단체 생명의 숲이 지난 7일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숲’ 부문에서 대상으로 선정했다는 사실은 이 같은 호기심에 값한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의 무덤이라는 딱딱한 사실 아래에는 풍성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동해고속도로의 종점인 동해IC를 나와 삼척 방면으로 내려가다가 38번 국도를 이용, 도계 방면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준경묘를 가리키는 표지판을 만난다. 준경묘로 가는 길은 험하다. 일반 차량 진입은 통제되니 걸어서 가는 수밖에 없다.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마을 입구에 들면 ‘준경묘 1.8㎞’라고 씌어진 표지판을 만난다. 그 정도쯤이야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대단한 착각이 아닐 수 없다. 급경사 지역을 오르는 난코스의 연속. 그렇게 연신 이어지는 골짜기를 40분쯤 올랐을까.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 갑자기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나고 잘 조성된 묘지가 나타난다.
시야를 먼저 사로잡는 것은 소나무이다. 하늘을 찌르듯 쭉쭉 뻗었다. 전문가가 아닌 문외한이 한 눈에 보아도 잘 생겼다. 호젓한 진입로를 걷기에도 좋다.
바닥에 깔린 색 바랜 솔잎마저 제법 두툼해 카펫마냥 푹신한 느낌마저 준다. 거기에다, 초록 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싱싱한 잎과 이뤄내는 절묘한 색의 대비는 예기치 못 한 감흥을 안긴다. 산 것과 죽은 것을, 저토록 잔인하리만치 아름답게 대비시키다니.
마음을 가다듬고 진입로 옆에 난 계단을 오르자. 특이한 소나무 한 그루가 기다린다. 높이 30m가량의 100년 묵은 이 소나무는 충북 보은의 정이품송과 혼례를 맺어 화제가 된 주인공이다. 산림청 임업연구원이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 다닌 끝에 찾아낸 가장 형질이 뛰어난 소나무. 보는 순간 피로가 봄눈 녹듯 한다.
묘지는 여느 왕릉 못지않게 화려하다. 태조의 4대 할아버지인 목조 이안사가 아버지의 묘자리를 보러 다니는데, 한 노승이 나타나 이 곳에 묘를 쓰면 5대 이내에 왕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조선 왕조의 탄생이 이 곳에서 시작됐다고 하니 성역화한 것은 당연지사인 셈이다. 선대의 뜻을 기려 1899년 고종 임금이 공들여 조성했고, 오늘날까지 이어 오는 것.
묘지 뒤는 온통 황장목(黃腸木)숲이다. 황장목은 겉은 누렇지만 속은 붉은 기운이 감도는, 소나무 중 으뜸이라는 소나무. 궁궐을 짓는 역사에 바로 이 소나무가 쓰였다. 2001년 경복궁 복원 사업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시원스럽게 뻗은 소나무숲이 묘를 감싸고 있으니 영락없는 명당 자리이다.
험한 길을 걸어야 하는 준경묘가 부담스럽다면, 이 곳에서 3㎞가량 떨어진 영경묘(永慶墓)를 찾는 것도 좋다. 이양무 부인의 묘소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38번 국도를 다시 돌아 나와야 했으나 최근 새 길이 뚫려 차를 타고 5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준경묘 만큼은 아니지만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소나무숲길을 만난다.
준경묘가 호랑이상을 한 남성적인 지세를 가졌다면, 영경묘는 아기를 감싸 안은 여성의 모습마냥 포근하다. 그래서일까, 이 곳에서 자라는 소나무 역시 헌걸찬 기개보다는 다소곳이 안으로 보듬듯 여성스럽다.
예까지 와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또 하나 있다. 영경묘에서 17㎞ 떨어진 천은사(天恩寺)는 고종 임금이 두 묘를 조성한 뒤 원찰로 삼은 절이다. 고려의 학자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저술한 현장이기도 했던 내력 때문일까, 서권기(書券氣)가 숲을 감싸고 있는 듯 하다. 게다가 계곡과 어우러지는 주변 경치 또한 꽤나 아름답다. 삼척시 문화공보실 (033)570-3224
삼척=글ㆍ사진 한창만기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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