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말이지만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현대에도 여전히 신화 혹은 신화적인 것들이 소비되고 또 욕망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를 따라다니는 ‘최연소’라는 수사 안에서 그것을 느낍니다. 이례적인 일 앞에서 느끼는 사람들의 놀라움과 반가움. 그리고 그것을 서사화 시키고싶은 욕망을- 소설 쓰는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다만 저는 작가이기 때문에 ‘신화는 진실이 아니다’라고 단순하게 부정하기 보다는 신화를 둘러싼 현대의 그 이야기 욕망을 이야기꾼으로서 진지하게 고민해보려 합니다. 저는 최연소라는 수사 주위에서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것을 응시하겠습니다.
저는 신화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이 주는 달콤함과 매혹 그리고 그 혜택에 대해 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지금 그것으로부터 혜택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되고 싶은 건 ‘신화’가 아니라 ‘작가’입니다. 또한 제가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아니라 ‘좋은 작가’입니다.
그리고 제가 받는 이 상이 1회가 아니라 38회라 기쁩니다. 제 안의 어떤 새로움이 있다면 그것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바로 그 38년 동안의 문맥 안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따금 주위의 염려를 듣지만 그 걱정 안에서 또 다른 기다림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신화를 욕망하는 만큼 그것의 죽음도 욕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살아있겠습니다. 한편으론 ‘그러니까 오래 써야겠다’는 생각보다 ‘좀 그러면 또 어때’ 하는 얄궂은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만 때때로 자신이 쓸 수 있을 때까지만 쓰는 것도 작가의 도덕이 아닐까요.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듯 방긋 웃으며 말하건대 저는 소설을 쓰겠습니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즐거워서, 저는 쓰겠습니다. 저는 사람들과 이야기로 만나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러니 저는 두 팔을 쭉 내밀며 뻔뻔하고 담담하게 이 상을 받겠습니다.
진심으로 기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김 애 란
■ 제38회 한국일보문학상 시상식 이모저모
제38회 한국일보문학상 시상식 날인 24일 정오, 수상자인 김애란(25)씨는 당선 소감 글을 첨부한 메일에 “이제 드레스를 찾으러 세탁소로 달려가야겠습니다”라고 썼다.
하지만 행사 1시간여 전, 도착한 그는 소박한(!) 정장 차림이었다. 하루 전 출간된, 수상작이 실린 자신의 첫 작품집을 한아름 싸안은 채였다. “드레스요? 킥킥~ 그 말을 믿었어요?” 그는 책 속표지에 일일이 서명을 하며 “손님들께 드릴 선물인데, 부족하면 어떡하냐”며 마음을 썼다.
시상식 수상 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 그는 “최연소라는 수사 주위에서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것을 응시하겠”다고, (그냥)‘작가’가 아니라 ‘좋은 작가’가 되고싶고, 또 그러겠다는 약속으로 “뻔뻔하고 담담하게 이 상을 받겠”다고 말했다. 그는 먼 훗날 어느 문학상의 최고령 수상자로 서게 될 자리에도 마음의 드레스를 입고 행사 시작 훨씬 전에 나타나 내객을 기다릴 것이다.
문학상 시상식에는 10여 년 만에 처음 참석한다는 선배 소설가 이인성(서울대 불문과 교수)씨는 축사에서 “부디 이 격려가 앞으로 구차한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세계를 더욱 깊고 넓게 펼쳐나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날 오후 5시 한국일보사 12층 송현클럽에서 열린 시상식 행사에는 모교(한국예술종합학교) 은사인 황지우 시인과 소설가 김영하씨를 비롯, 본ㆍ예심 심사위원들과 선배 시인ㆍ소설가 50여 명이 자리를 함께 했고, 본사 정기상 부사장과 후원사인 한국가스공사 최규선 부사장을 비롯한 양 사 임원들도 수상자를 축하했다.
최윤필기자
■ 문학상 수상자 김애란 첫 작품집 '달려라, 아비'
솔직함과 무례함이 습자지 한 장 차이인 것처럼, 연민과 오만도 그리 먼 말은 아닐 것이다. 자기연민은 특히나 그러해서, 지금껏 겪고 보고 느낀 바 그것들은 근거 없는 자기애의 그늘일 때가 많다.
그 경우 자기연민은 내적 성숙의 거름이 아니라 과도하고 터무니없는 자기애에의 어쭙잖은 겸양이거나 대자적 알리바이일 뿐이다. 자칫 방심하면 연민과 오만, 자기연민과 자기애는 분신처럼 분열하며 끝없이 스스로를 복제하고 증폭한다.
그 허름하고 유치하기까지 한 연민 혹은 자기연민의 이면을 봐버린 자들은, 대개 멀찍이 떨어져 방관자의 시선으로 위장하거나 위악과 냉소로 무장한 채 삶을 대하게 된다. 그것은 어색해서 옹색하고, 옹색해서 불편한 일이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스스로 우스꽝스러워지거나 모두를 우스꽝스럽게 봐버리는 것이다. 이 때의 우스꽝스러움(혹은 우스꽝스러워짐)은 가벼움으로 깊이를 초월하고 단순함으로 뉘앙스를 무화(無化)하면서, 연민과 오만의 간극을 넘어설 수 있는 기막힌 전술이 된다.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을 표제작으로 한 김애란씨의 첫 작품집 ‘달려라, 아비’는, 그 같은 연민과 자기연민의 맥락과 양상과 이면들, 그 이면에 맞서는 다양한 전술들을 떠올리게 한다. 잘라 말해, 자기연민의 유혹을 넘어 가볍게 웃어버릴 수 있는 삶의 방식으로서의 전술집이랄까. 작가는 여러 화자들의 말과 생각과 행위들을 통해 그 전술들을, 새로운 화법과 유쾌한 이야기로, 근사하게 시연하고 있다.
“어머니가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다.” 표제작 ‘달려라, 아비’의 화자인 ‘나’에게는 만삭의 아내를 외면하고 집을 나간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아비 없이 가난 속에 자란 자신에 대한 연민도 없다. 아니, 없는 듯하다. 오히려 얼굴 주름 구기는 우스꽝스러운 배냇짓에 어머니가 자주 웃었듯, “사랑이란 어쩌면 함께 웃는 것이 아니라 한쪽이 우스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버지를 우스꽝스러운 모습(털 많은 다리에 분홍색 야광 반바지를 입고 벌게진 얼굴 위로 황니를 드러내고 웃으며 시종 달리는)으로 공상한다. 스카이콩콩을 얻는 조건으로 내민 ‘고추’를 보며 행복해 하던 아버지의 모습에 착안, “훌륭한 사람이 되기 전에 먼저 우스운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기도 한다. (‘스카이 콩콩’의 ‘나’ 64쪽)
이들은 살뜰함이나 절실함, 진지함에도 가식의 혐의를 둔다. ‘사랑의 인사’의 ‘나’는 유년시절 놀이동산에서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지만, 오히려 ‘아버지가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상처를 들여다보(려)는 세상의, 그리고 ‘나’ 자신의 시선이 두렵다. 물론 ‘나’는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알지 못할 뿐 언제나 있던 심해 생물처럼 어딘가에 존재할 것임을 믿는다. 하지만, 아니 그래서 더욱 “내가 제일 그리워하는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세상의 어떤 무심함, 아주 특별한 종류의 무심함”(148쪽)이다.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알레고리 소설로 읽히는 ‘종이 물고기’의 ‘나’는 소설 속 자신의 작품에 “절실함은 내게 언제나 이상한 수치(羞恥)를 주었다”(211쪽)고 쓰기도 한다.
그러니 이들 화자에게 세상과 주변과 자신에 대한 안전거리 확보는 삶에 대한 기본 전술이다. 또 아예 환경으로서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아득히 먼 시공간의 존재들과 친한 척하기도 한다. 우주 속 먼 별의 누군가나 괴물 ‘네시’와의 소통을 생각(76, 142쪽)하고, 심해 생명체들의 존재에 적극적으로 감응하고(150쪽), 집 앞 가로등 위에 내려앉는 익룡이며 오줌 싸는 크로마뇽인, “가로등 기둥을 붙잡고 훌쩍이는 마오리족 패잔병”의 환상을 떠올리는 것도 어쩌면 가까운 것들, 그래서 끈적끈적하게 내 감정에 개입하려는 것들을 따돌리기 위한 전술일 지 모른다.
모든 감정적인 얽힘은, 그것이 진지한 것일수록 더 집요한 오해를 낳는다. 그 오해를 견디는 일은, 그 오해가 두려워 말의 텍스트보다 컨텍스트에 얽매이는 일은, 외롭고 어렵고 ‘그녀’를 잠 못 들게 한다.(‘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외로움의 고통은 혼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혼자인 것을 모두가 ‘보고’ 있기 때문”(‘영원한 화자’)이다.
“나는 따뜻한 사람이지만, 당신보다 당신의 절망을 경청하고 있는 나의 예의 바름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례한 사람”인 ‘나’는, 또 뭔가를 잘 아는 듯, ‘진짜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 “잘난 척 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는 것을 아는 ‘나’는, ‘당신’의 근처까지는 가지만 다가서지는 않는, “점점 여기 없는 사람인 척하는 사람”(‘영원한 화자’)이다.
그러니 그의 소설은 사무치게 슬프다. 넘어져 깨진 무릎이 아프고 쓰리지만, 제 일처럼 걱정해주려는 시선들이 부담스럽고 불편해서 “하나도 안 아파”하고 웃으며 자위하는, 아니 아예 무릎이 깨진 사실조차 부인해버리려는 자의식의 존재들. 하지만, 소설 속 아무나 붙들고 그렇게 말하면, 그는 멀뚱멀뚱 쳐다보며 “혹시 저를 아세요?”라며 시치미를 뗄 것이다.
그들이 터득한 ‘흐르는 물에 손을 베이지 않고도 칼을 씻는 방법’(138쪽)들이 절실해질 때가 있다. 살다 보면, 뜻밖에 자주.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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