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무덤, 푸르고’(1993년)는 최승자(53)의 네 번째 시집이다. 거기 실린 ‘미망(未忘) 혹은 비망(備忘) 14’라는 작품에는 “우연의 형식들로 다가오는 모든 필연을 견디면서”라는 시행이 보인다. 시간 속에 갇힌 인간의 무력함을 이토록 구슬프게 요약한 말도 달리 찾기 어려울 것이다. 시간은 독재적이다.
그것은 선형(線形)의 무자비함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앗는다.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시간축이 직선으로 뻗어있고 그것이 이 우주에 유일무이하게 존재하는 시간축이라면, 생명체의 자유의지는 들어설 곳이 없다.
내가 어느 순간 저지른 일말고 다른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축말고 다른 시간축을 상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인과율은 인간의 뇌를 구성하는 입자들마저 여지없이 꿰뚫는다.
우리에게 긍지를 주는 자유의 느낌은 결국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우연으로 여기는 것은 죄다 필연이다. 선택이나 결정은 우리 몫이 아니다. 우리는 그 순간, 거기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선형의 유일한 시간은 자유의지만을 앗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엄밀한 인과의 사슬을 통해, 현실 속 세계의 진행 전체를 가능한 유일의 것으로 만든다. 일어난 일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서기 79년 8월 나폴리만의 베수비오산이 분화(噴火)해 그 남동쪽 항구도시 폼페이를 삼킨 것은 시간의 탄생 때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그 때 거기서 일어난 일이 우연이었을 가능성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시간축을 상정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 시간축을 경험해볼 방법이 없다. 다시 한번, 우리가 우연으로 여기는 것은 죄다 필연이다. 우리는 그 필연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물리학자들과 과학소설가들의 말랑말랑한 상상력 속에는 또 다른 시간축이 존재한다는 것을. 소립자의 세계에서는 결정론이 힘을 잃고 우연의 주사위놀이가 벌어진다는 것을. 시간은 3차원 공간과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공간의 상태(이를테면 중력장의 영향)에 지배된다는 것을. 그래서 어떤 조건 아래선 시간과 공간이 서로 변환될 수 있음을.
그러나 현대물리학의 이 신비로운 전언은 우리 일상 속에서 결코 납득되지 않는다. 또 우연이라는 것이 양자역학 바깥에까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세계를 통제할 방법은 여전히 없다.
딴 시간축으로 건너가 볼 수 없는 한, 내 로또복권이 일등에 당첨된 것은 ‘우연의 형식으로 다가온 필연’이었을 따름이다. 우리가 세계를 통제하고 있다고 느낄 때조차, 우리에게 자유의 느낌이 충일할 때조차, 우리는 현실 속의 유일한 가능성에, 곧 필연에 얽매여 있을 뿐이다. 이 필연의 세계에, 자유의지가 박탈된 세계에, 책임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비난할 수 없듯이, 우리의 적들을, 범죄자들을 비난할 수 없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허무의 사제인 나는 오늘밤도/ 너를 위한 허무의 미사를 집행할 뿐”(‘내가 구원하지 못할 너’)이다. 따지고 보면, 이런 ‘허무의 미사’마저 화자의 자유의지와는 무관하다. “너를 위한 허무의 미사를 집행”하는 것은, 유일하고 선형적인 시간축 안에서,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가능성일 뿐이다.
‘내 무덤 푸르고’는 이런 유일하고 선형적인 시간의 압제 아래 납작하게 펼쳐져 있다. 이 시집의 화자들은 시간의 압제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 그들은 시간의 압제에 제 몸뚱이를 맡긴다.
사실, 싸우든 굴종하든 달라질 것은 없다. 아니, 싸우는 것조차 결국은 굴종하는 것이다. 맨 처음에 최후의 분자운동까지가 미리 결정된 우리들의 시간 속에서는, 싸움이든 굴종이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정될 뿐 결정할 수 없다. 이것을 깨닫는 것은 서러운 일이지만, 이 서러운 깨달음조차 맨 처음에 이미 결정되었다.
유일하고 선형적인 시간 속에 갇혀있는 한,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의 환상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래서 이 시집의 한 화자는 말한다. “영원토록 길이 나를 가둔다. 영원토록 길이 나를 해방시킨다”(‘미망 혹은 비망 14’). 그 길 위에서, 다시 말해 시간 속에서, “희망은 길고 질기며/ 절망은 넓고 깊”(‘미망 혹은 비망 15’)을 수밖에 없다.
‘내 무덤 푸르고’의 앞부분에 실린 열여섯 편의 시는 ‘미망 혹은 비망’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말하자면 이 시들의 모티프는 기억이다. 기억은 생물체의 뇌에 새겨진 과거의 그림자와 메아리다. 그것은 “말로든 살로든 못내 비비고/ 싶어하는 한 마리의 포유동물./ 그 뇌 속 회백질의 긴 회랑 속에서/ 언제나 울리고 있는 발자국 소리들./ 사라지지 않는 발자국 소리들”(‘미망 혹은 비망 6’)이다. 그것은 시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기억은 시간 속에 존재한다. 그런 한편, 기억을 지워내는 것 역시 시간이다. 시간은 기억을 만들어내고 지워낸다. “그래, 이 시간에도 추억들이,/ 차디찬 도랑물 속에 추억들이,/ 눈 꼭꼭 감은 시체들이 줄지어 떠내려가고,/ 기억의 짐을 싣고 밤배는 또 고단히/ 요단강을 거슬러오를 것이다”(‘미망 혹은 비망 6’).
‘미망 혹은 비망’이라는 제목은 언뜻 이 화자들이 기억에 집착하고 있다는 느낌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 시편들을 포함해 ‘내 무덤, 푸르고’의 공간 전체를 통해서 기억에 대한 화자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화자들은 기억을 붙들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지워내고 싶어한다. 둘을 견줘보면 망각의 욕망이 외려 더 크다.
시집 표제를 첫 행으로 삼은 ‘미망 혹은 비망 8’의 화자만 해도 “내 무덤, 푸르고/ 푸르러져/ 푸르름 속에 함몰되어/ 아득히 그 흔적조차 없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삶 속의 죽음의 길 혹은 죽음 속의 삶의 길/ 새로 하나 트이지 않겠는가”고 말함으로써, 완전한 망각을 통해 평심에 이르고자 한다. 연작시의 표제 ‘미망 혹은 비망’은 일종의 시치미 떼기인 것이다.
이런 건망 집착은, “목숨은 처음부터 오물이었다”(‘미망 혹는 비망 2’)거나 “칠십년대는 공포였고/ 팔십년대는 치욕이었다./ 이제 이 세기말은 내게 무슨 낙인을 찍어줄 것인가”(‘세기말’) 같은 시행에서 보듯, 흘러간 시간이 존엄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화자의 판단에 바탕을 둔 듯하다. 마흔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쓴 시들에 죽음의 이미지를 거듭 들이미는 것도 시인이 살아낸 시간의 시틋함과 줄이 닿아있을 것이다.
‘무슨 꽃을’의 화자는 “아마도 이대로 이렇게,/ 초월인지 체념인지/ 햇빛인지 달빛인지/ 육십 평생이 맥빠진 산문처럼 흘러갈 것이다//(...)// 삼십대의 허공에서 어느 한 순간,/ 너무도 지겨운 어느 한 순간,/ 나는 내 목숨의 끈을 가볍게 놓아버릴 수는 없을까?”라며 생의 시틋함과 죽음의 유혹을 노골적으로 털어놓는다. 그를 죽음의 유혹으로 이끄는 것은 “무슨 꽃을 보여주랴?/ 마술상자 속에 꽃이 다 떨어졌으니”라는 판단이다.
이렇게 된 마당에야, 그는 더 이상 “일초일초 분명히 나를 비웃으며/ 시간이 내게 초치는 소리”를 듣기가 싫은 것이다. 그는 시간의 압제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 ‘마술상자 속 꽃’의 다른 이름은, 고답적이기도 해라, 영혼이다. ‘내 무덤, 푸르고’의 화자가 “내 영혼의 집 쇼 윈도는/ 텅 텅 비어있다”(‘너에게’)거나 “그대 영혼의 살림집에/ 아직 불기가 남아 있는지”(‘그대 영혼의 살림집에’)라거나 “똥이 곧 예술이 될 수 있고, 상품이 될 수 있는 이 시대에/ 쓰자, 그까짓 거, 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짓거./ 영혼이란 동화책에 나오는 천사지”(‘자본족’)라며 영혼에 집착할 때, 그 영혼의 고갈은 이 화자들의 책임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동화책 속으로 추방한 시대의 책임이기도 하다. 아뿔싸! 책임이라니? 시간이 지배하는 필연의 세계에서는 누구에게도 책임이라는 걸 물을 수 없다!
‘내 무덤, 푸르고’는 시간의 냉혹함 앞에서 기겁해 무릎꿇은 자의 시린 외로움으로 그늘져있다. 화자들은 절망하고 두려워하고 분노하며 자기 방기와 자기 파괴의 경계를 서성인다.
그러나 이 극도의 의기소침은 최승자 특유의 지적이고 활달한 언어의 부력에 들려 시집 전체를 착잡한 생기의 공간으로 만든다. ‘내 무덤, 푸르고’는 무기력의 입자들로 채워진 기력의 공간이고, 끔찍할 만큼 통찰적인 시집이다. 이렇게 된 것은 시인의 재능 ‘덕분’도 아니고, 시인의 재능 ‘탓’도 아니다. 유일하고 선형적인 시간 속에서는, 처음부터 일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으니.
▲ 하안발(下岸發) 5
죽은 사람의 손톱 발톱 머리칼이
무덤 속에서 조금은 더 자라듯,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누워 있는 흐린 구름장들을 바라보면서
키 작은 여자는 낮은 창 곁에서
하루하루를 살해한다.
현세는 너무 비좁은 감옥이라고,
꿈꿀 수 있는 가장 큰 지도를 그리겠다고,
흐린 구름들이 엎어질 듯
코를 박고 있는 낮은 창 곁에서
키 작은 여자는 하루하루를 삭제시킨다.
오직 한 개씩의 커다란 눈망울만을 달고 흔들리는
해바라기들, 해바라기 들판의 무한을 꿈꾸면서.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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