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은 이수일 전 국정원 2차장의 자살에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임동원, 신건 두 전직 국정원장의 구속에 이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반발로 가뜩이나 호남 민심이 뒤숭숭하던 차에 이 전 차장의 자살은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결과로 작용할 것이란 우려에서다.
청와대 김만수 대변인은 21일 “논평할게 없다”고 말을 아꼈지만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청와대가 검찰에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며 불똥이 튈 것을 경계했지만, 상황 악화를 걱정하는 눈치였다.
열린우리당도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 정세균 의장 등 지도부는 “참으로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하곤 입을 다물었다. 잇따라 터지는 호남 관련 악재에 뾰족한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이대로면 지방선거를 치르나마나” “서울 경기는 물론 호남도 잃게 됐다”는 말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다. 호남 의원들은 “호남 민심이 폭발일보 직전”이라고 걱정했고, 이런 우려는 지도부에도 전달됐다.
이 전 차장의 자살로 호남 의원들 사이에서 제기돼온 민주당과의 통합논의도 주춤하는 분위기다. 우리당의 염동연 주승용, 민주당 이낙연 의원 등이 26일 회동, 통합문제를 논의키로 했으나 이 일정도 전격 취소됐다. 이영호(전남 강진ㆍ완도) 의원은 “지금 통합론을 거론할 때가 아니다”고 했다.
여권의 걱정은 또 있다. 김 전 대통령이 검찰의 무리한 수사를 문제삼은 차에 이 전 차장이 자살했기 때문에 검찰 수사에 무리한 점이 있는가도 면밀히 살피고 있다. 만에 하나 이 전 차장에 대해 강압수사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면 검찰은 물론 여권 전체가 책임을 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당내에서는 검찰을 향한 볼멘 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주승용(전남 여수을) 의원은 “검찰이 미림팀 수사는 제대로 하지 못하고 국민의 정부 국정원장만 구속한 것은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며 “호남 뿐 아니라 전 국민이 의아해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권 일각에서는 다른 목소리도 있다. 도청 수사결과 국민의 정부 시절 조직적인 도청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는데 어떻게 그냥 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미림팀이나 안기부 X파일 수사를 더 철저히 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호남 정서를 생각해 도청을 덮을 수는 없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이 전 차장의 자살이라는 민감성, 호남 민심을 걱정하는 흐름 속에 묻혔다.
염영남기자 liber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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