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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40) 나만의, 오로지 나만의 장정일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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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40) 나만의, 오로지 나만의 장정일에 대해서

입력
2005.1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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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 흔히 ‘신세대 소설’의 효시라 불리는 장정일이지만, 내게 장정일은 여전히 시인으로만 남아있다. 나는 ‘아담이 눈뜰 때’ 이후 출간된 그의 소설을 단 한 편도 제대로 읽어 본 적 없다(그럼에도, 영화로 만들어진 그의 대표작들은 전부 다 봤다).

그의 전업(轉業)이 시에 대한 배신으로 여겨졌던 게 아니라, 습작 시절, ‘햄버거에 대한 명상’과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를 책장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읽고 난 어느 시점 이후로 그에 대한 관심이 현저히 떨어졌던 것뿐이다.

장정일 스스로도 위에 든 시집 두 권이 젊은 한때 ‘시귀(詩鬼)’에 들려 썼던 것들이라고 공언하듯, 내게 장정일은 아직도 이십대 중반의 불온하고도 전복적인 상상력을 재기발랄하게 풀어낸 개성적인 시인으로 기억된다. 이른바 ‘거짓말’ 파문으로 TV 뉴스에까지 등장한 그를 놀라울 정도로 무심하게 바라봤던 기억이 문득 떠오르는데, 그랬던 만큼 나는 그의 소설에 대해 어떠한 감상이나 평가도 전할 수 없다. 이 글은 ‘시인 장정일’에 대한 일방적인 기억을 호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지난 달 발간된 ‘장정일 문학선집’(전6권, 김영사)에 시선집은 ‘주목을 받다’ 한 권뿐이다. 그런데, 57편이 수록된 이 시선집에 앞서 말한 두 시집의 흔적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삭제되어있다. ‘작가 후기’에서 장정일은 그 의도를 이렇게 자백한다.

“여기 실린 시들이 내 시의 진면목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세 시집(’상복을 입은 시집‘’서울에서 보낸 3주일‘’천국에 못가는 이유‘- 인용자 주) 가운데서도 일부러 가장 ’내 것’ 다운 것을 빼고 가장 평이한 형식과 친근한 주제를 가진 것들만 골랐다. 그만큼 ‘늙어, 힘이 빠졌다’는 뜻도 되지만, 현대시의 쇄말성과 난해함을 씻어보자는 뜻도 있다.”

대개 자타 공인 ‘진면목’이라 불릴만한 것들로만 묶이는 게 관습화된 ‘선집’의 의도이자 계산으로 여겨지건만, “일부러 가장 ’내 것’ 다운 것을 빼고” 선집을 묶은 장정일의 태도는 약간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과연 ‘장정일답다’는 말이 절로 나오게끔 하기도 한다.

장정일은 ‘시귀’에 들려 있던 자신의 특정한 과거를 취사선택 않고 온전히 보호함으로써 다시 찾지 못할 ‘내 것’을 더욱 강화하는 동시에 ‘쇄말성과 난해함’에 빠져 흐느적거리는 당대의 시적 풍토에 나름의 비판적 시선을 던지려는 듯 보인다.

사실, 남다른 주파 능력을 가지고 돌올하게 솟아있던 그의 예전 시들에 비한다면 요즘 시들은 소위 현실길항력이란 측면에서 사뭇 밋밋하고 공허한 게 사실이다. 요즘 젊은 시인들에게 현실이란 장정일 때만큼 치열하게 삶의 한복판에 엉겨드는 물적 토대로서의 의미가 매우 얕다.

젊은 시절의 장정일이 어수선한 사회상황과 절박한 생존욕구로 빳빳하게 감각을 곤두세웠던 반면, 그보다 십여 년 이상 뒤처진 세대들의 시는 삶과 환상의 중간지대에서 자족적으로 이행되는 유희로서의 기능이 더 강하다. 때문에 ‘글쓰기가 직업이 아니라면, 구역질이 난다’(‘인지 위에 쓴 시’ 말미에 붙은 첨언)는 장정일의 말에 대한 그들의 체감온도는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장정일에 비하면 비교적 무난하고 고초 없는 삶을 살아온 그들에게 문학은 삶의 향신료일지언정, 주식(主食)으로써의 기능은 다소 미약하다. 이건 그들이 문학의 위의(威儀)를 가벼이 여긴다는 뜻이 아니다. 대중문화 세례와 패셔너블한 감각, 미적ㆍ지적으로 리버럴한 사유체계를 지닌 요즘 시인들에게 향신료와 주식의 차이는 그닥 크지 않다.

이 짧은 글에서 그들의 다종다양한 성향을 한꺼번에 운위하는 건 아전인수가 될 확률이 높지만, 거칠게 일반화하자면 배를 곯아 죽는 걱정은 않을지언정, 오로지 자신만의 향신료가 없어졌다는 이유로 자살할 수도 있는 게 요즘 아해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아마도 장정일의 발언에 이런 대구를 칠지도 모른다. ‘글쓰기가 직업이라면, 구역질나서 못할 것이다’라고.

이 말은 현대시의 ‘쇄말성과 난해함’을 꼬집은 장정일에게 절반쯤 반대하면서 편협하게 던져보는 투정이나 진배없다. 시에 관한 한, 장정일은, 그 스스로 고백한 만큼 ‘늙어, 힘이 빠’져 보인다.

그러나 내 나름의 편견은 여전하되, ‘장정일 문학선집’을 전체적으로 훑어보면 문학 전반에 관한 한, 장정일은 의외로, 여전히 ‘젊어, 힘이 있’어 보이는데다가 매우 전략적이기까지 해서 놀랍다.

때문에 모든 유추가능한 정황들을 두루 살핀 후 소위 ‘후보선수’들로 구성된 ‘주목을 받다’를 다시 읽어보면 독특한 재미가 있다. 생각건대 그 재미는 한 작가의 문학적 기원을 A급이 아니라 B급으로 훔쳐보는 간텍스트적인 관음욕구에서 출발한다.

이런 관음욕구는 일차적으로는 독자를 유혹하지만, 스스로의 숨은 욕망을 ‘실크커튼’ 너머로 은근슬쩍 내비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작가 자신의 노출욕구를 충족시켜준다. ‘주목을 받다’의 매 시편마다 짤막한 사족으로 붙어 있는 말들은 그러므로 이 시선집의 진짜 ‘몸통’처럼 읽힌다.

그 숨은 듯 노골적으로 드러난 ‘몸통’은 장정일의 문학적 사견들이 생성되는 지점이자, 그 고집스러운 사견으로 그가 세상과 문학에 대한 그만의 독자적인 시각을 벼리는 초크로 작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부러 ‘진면목’을 빼고 2군으로 포진시킨 ‘주목을 받다’는 새삼스레 주목할 만하다. 장정일의 소설을 사랑하는 팬들이여, ‘장정일 문학선집’의 포문을 여는 이 건성인 듯 치밀한 시선집을 부디 간과하지 마시라.

시간 순서로 봤을 때 ‘문학선집’의 둘째 권으로 놓이는 건 그의 초기 단편들이 수록된 ‘아담이 눈뜰 때’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봤을 때, ‘아담이 눈뜰 때’는 그 문학적 성과와 가치를 논하기 전에 존재만으로도 장정일을 이 시대의 문제적 작가로 재탄생시킨 범상치 않은 통과의례 작품이다.

통과의례란 건 ‘시귀’를 떠나보내며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장정일 개인에게만 통하는 게 아니라,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을 가지고 싶어 했던 그 이후 세대의 문학적 감수성을 통틀어 하는 말이다. 위의 문장은 이후 ‘신세대 문학’을 논하는 데 있어 암시적인 주술처럼 인용되었다.

지금 아해들이라면 ‘초고속 슬림형 노트북과 나라 요시토모의 그림을 볼 수 있는 시디롬과 엠피쓰리 파일을 고음질로 들을 수 있는 다기능 아이리버’를 가지고 싶다고 말하겠지만, 어쨌거나 ‘아담이 눈뜰 때’는 소위 분단과 정치문제에 대한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한국문학의 유구한 콤플렉스를 ‘개무시’하며 당당히 섹스와 마약을 밝히는 신세대 ‘아담’의 전면적 출현을 예고했다.

앞서 말했듯 이 소설은 내가 (아직까지는) 마지막으로 읽은 장정일의 작품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보건대 표제작보다는 선집에 같이 묶인 ‘아이’나 ‘펠리컨’ 등의 단편에 더 눈이 간다.

장정일이 소위 소설가로 뜨기 전 씌어진 이 단편들은 내가 여전히 그를 시인으로만 여기고 있던 시절에 처음 읽었었다. 그때는 잘 나가는 시인이 ‘그냥 한번’ 써본 소설정도로 치부하곤 ‘꽤 재미있네’하는 촌평으로 감상을 갈무리했던 기억이 있지만, 다시 읽어보니 시인에서 막 ‘턴오버’하려는 작가 장정일의 문학적 역량의 토대가 여실하게 드러난 작품들이라 여겨진다.

‘펠리컨’은 삶의 부조리를 폭로하는 일종의 우화소설이랄 수 있는데, 과문한 내가 보건대 이토록 스피디하게 읽히면서도 목울대에 뭉클하게 감겨 들며 비릿한 여운을 남기는 한국 단편을 읽은 기억이 많지가 않다.

이건 비단 ‘펠리컨’뿐만 아니다. ‘아담이 눈뜰 때’에 같이 묶인 단편들은 일종의 ‘문학적 돌연변이’로서의 장정일의 소설가적 면모를 첨예하게 드러낸 자취들로 가득하다. 이 작품들 이후 본격적인 장편 작가로 입지를 쌓고 급기야 ‘삼국지’에까지 도전하면서 독보적인 문호에의 욕망을 드러낸 장정일이지만, 내게 그는 아직도 ‘눈 뜨기 전의 아담’의 모습으로만 질기게 공명한다.

때문에 말끔한 양장본으로 다시 묶인 ‘너에게 나를 보낸다’ 등의 출세작들이 내게는 여전히 난감할 뿐이다. 처음 나온 십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 책들은 술자리에서 수시로 합석하게 되지만 도무지 친해지지는 않는 어떤 사람들을 연상케 한다. 예감컨대 나는 이 소설들을 앞으로도 읽게 되지 않을 것 같다.

선집 발간 기념으로 인터뷰를 하려 했다가 도무지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어 포기한 건 이 때문이다. 나는 그저 그의 일부를 전부인 양 착취하면서 그의 특출한 문학적 재능을 약간은 질투하고 약간은 배배꼬면서 내 멋대로 그를 향유할 뿐이다. 그 나머지는 그의 소설에 여전히 열광하는 수많은 ‘당신’들이 하시라.

시인 강정 nietz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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