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취미가 둘 있다. 하나는 스포츠, 특히 공을 가지고 하는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공부다. 운동은 하루에 한 시간 내지 두 시간, 공부는 평균 세 시간 정도를 한다.
주로 성경에 대한 공부다. 또 하나는 부처님이나 노자의 가르침 따위의 주로 성인들의 가르침에 대한 책을 읽는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주로 미국의 스릴러 소설을 읽는다. 원래 영어 단어를 잊어 먹지 않기 위해 가벼운 영어 소설을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 보니 스릴러 소설이 부담이 없고 좋아서 읽게 되었다. 마이클 코넬리와 존 그리샴을 제일 좋아한다.
나는 학교공부는 공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학교 공부를 하지 말자거나 학교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생을 두고 해야 할 일이 공부인데 평생을 두고 할 공부를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할 따름이다.
교육의 기능은 두 가지이다. 개인의 재능을 선별하여 사회에 배분하는 역할이 있는가 하면 개인의 재능을 살려 행복을 추구하게 해야 한다. 국가는 첫번째 기능에 충실하려 하겠지만 개인은 두번째 기능을 충실히 누려야 할 것이다.
바로 그렇게 되기 위해서 초ㆍ중ㆍ고등학교 시절에 재능과 소질, 관심사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초ㆍ중등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하고 대학은 그 관심과 재능을 선발하여 최대화 시켜주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양자 택일의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국가 경쟁력의 최대화'라는 목적과 '개인 행복의 추구'라는 목적을 동시에 이룰 수 있다.
아버님(전영창 전 거창고 교장)이 돌아가시고 미숙한 내가 학교를 맡게 되었는데 너무 힘들었다. 그 해 여름 머리를 식히기 위해 장승포에 낚시를 갔다가 장승포의 밤바다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그림을 꼭 그려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사진을 찍어다가 일요일 오후에 조금씩 그려 나갔다.
유화 물감을 구할 엄두는 못 내고 그냥 '에노그'라고 부르던 물감을 가지고 나무판에다 그렸다. 그러면서 내게 그림에 대한 열정과 재능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초ㆍ중ㆍ고 시절에 내 재능과 소질의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교육과정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만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재능에다 관심이라는 교육적 목적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고 슈바이처 박사는 재능이 음악에 있었지만 그의 관심사를 좇아 아프리카에서 의사로 평생을 살았다. 그러니까 재능만을 알아내서 계발시키는 것이 교육은 아닌 것이다. 재능의 발견 뿐만 아니라 관심의 발견(가치관의 정립) 또한 중요하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지식 공부만을 하는 것은 개인의 행복권을 추구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모든 부모들은 자녀들이 학교 공부를 잘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런데 학교에서 시키는 공부를 모두가 잘 해야만 하나? 또 모두가 잘 할 수 있는 일일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가 학교를 세워서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목적은 아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다. 국가가 필요한 사람을 길러내기 위해서다. 최초의 교육은 군인과 관료를 길러내는 일이 목적이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대학이 먼저 생기고 초등학교가 제일 나중에 19세기 말과 늦은 나라는 20세기 후반부에 들어와서야 생겨났다. 초기의 대학들은 귀족의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곳이었다. 아이들이 글자를 쓰고 읽고 셈을 할 줄 아는 것이 생산성을 높이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알고 나서야 초등학교 교육을 실시하고 또 의무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20세기를 지배한 교육에 대한 개념은 '아는 것이 힘이다'일 것이다. 대학이라는 것이 원래 귀족의 자녀나 신흥 자본가계급의 자녀들만이 받을 수 있는 교육이었고 대학교육을 받으면 당연히 사회의 지배계급이 되었다.
20세기 후반부에 들어오면서 서구사회에서부터 점차로 보통사람들에게도 대학교육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는 산업사회 이후의 사회는 단순히 군인(장교)과 관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과학을 비롯하여 다양한 학문 분야의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필요한 다양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서는 가능한한 모든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100년 전만 해도 감히 생각도 못했던 대학의 문이 일반인에게도 열리기 시작하자 경제적 여유만 되면 누구나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려고 하게 되었다. 대학교육을 받는 것이 가장 확실한 계층상승의 길이기 때문이었다.
대학교육을 받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보수가 낮은 직업과 직종에 종사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이러한 수 천 년 내려온 국가주도의 교육 즉 학교교육의 방향과 목적은 선도 악도 아니다.
사회발전 속도에 따라 어느 나라에서나 당연히 이뤄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국가 중심의 교육의 방향과 목적에서 한 발자국 비켜서서 아동중심- 인간중심-의 교육을 생각할 때가 되었다.
학교공부는 바둑 스포츠 낚시 등산 연기(연극 영화) 컴퓨터게임 따위와 같은 취미와 소질 가운데 하나다. 학교공부를 잘 할 수 있는 재능을 타고 나기도 하고 축구를 잘하는 재능을 타고 나기도 하고, 시를 잘 쓰는 재능을 타고 나기도 하고 바둑을 잘 두는 재능을 타고 나기도 한다. 분명 바둑도 공부해야 하고 연기도 공부해야 한다.
낚시 전문가가 되려면 낚시도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 전문 등산가가 되려면 등산도 공부를 해야 한다. 세상의 어는 직능도 취미도 연구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축구도 전문가가 있어서 우리나라 감독의 실력으론 세계무대에서의 경쟁에 불리하다고 판단되어 외국의 전문가를 감독으로 비싼 돈을 주고 데려오지 않는가.
학교공부는 여러 다양한 전문성 공부 가운데 하나다. 특히 지금의 우리나라 학교교육의 공부는 정말 수많은 공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사람에 따라 그 학교 공부를 잘할 수 있는 재능을 타고 나기도 하고 다른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재능을 타고 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사회가 계속 산업사회 시대의 틀에 고정된, 학교 공부만 잘하는 아이들을 기르는 일만 계속하겠다는 고집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안타깝다.
우리도 이제는 일단 먹고 사는 것이 전부이던 시대는 벗어났다. 아이들도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시대에서 어떻게 하면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을까를 더 많이 생각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아이들로 하여금 제가 재능이 있고 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을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세대가 다르면 교육도 달라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다르지 않으면 역사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게 된다. 아무도 역사가 정체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공부는 왜 하는가? 옛날에는 벼슬을 하기 위해서였다. 즉 상류사회-지배계급-의 의무였다. 산업사회 이후엔 보다 높은 경제적 직업을 얻기 위해서였다. 인간 사회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도 '참'을 추구하는 것을 공부라고 생각하고 그 길을 가신 분들이 있어왔다.
그래서 세상은 어둡지만은 않다. 부처님이 그런 분이시었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시었다. 노자가 그런 어르신이었다. 간디 선생님이 그런 분이었고 김교신 유영모 선생님이 그런 분이었다. 오늘 날에도 수많은 분들이 공부는 '진리를 탐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한 삶을 살고 있다.
아이들을 학교 공부의 노예에서 벗어나게 해주어야 한다. 자기의 소질이 무엇인지를 발견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부모도 자식의 재능과 소질과 관심이 무엇인지 발견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재능과 소질과 관심을 최대화해주는 일이 공부가 되도록 해야 한다. 학교교육도 그러한 방향으로 바뀌어야 하지만 원래 제도나 조직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기에 부모님들이 먼저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학생도 마찬가지이다.
둘째로,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공부를 하면서 살아가더라도 '참을 찾는 공부'를 쉬어서는 안된다. 거짓된 삶을 살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50이 되고 60이 되고 성공했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사람들도 거짓된 삶과 참된 삶에 대해서는 눈 먼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거짓은 헛된 것, 가짜, 속이는 것들이다.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아! 내가 헛살았구나!” 하게 되면 안되지 않는가.
사람마다 재능, 소질, 관심이 다르기에 그것을 최대화하는 공부 역시 사람마다 달라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아름다워진다. 그리고 누구나 죽을 때지 가짜 삶이 아닌 참 삶은 무엇인가, 거짓된 삶을 살지 않고 참된 삶을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학문이란 말이 원래 묻는 일을 배운다는 말 아닌가.
■ 전성은 거창고 교장은…
전성은 거창고 교장은 바른 사람을 길러내는 바른 교육을 학교 교육에서 실천한 교육가 전영창 선생(1917~1976)의 아들로, 그 역시 학생을 바르게 키워내는 일에 평생 관심을 쏟아왔으며 2003년부터 2년간 정부의 교육혁신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1944년 전북 무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농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65년부터 거창고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인 1976년부터 90년까지 거창고 교장 직무대리와 교장을 맡았으며 이어 같은 재단의 샛별초등학교와 샛별중학교의 교장을 차례로 지냈다.
2005년에 거창고 교장을 맡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교사로서는 사회과목을 가르쳤으나 교장으로서는 성경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교장이 수업을 해야 학생들을 속속들이 알 수 있으며 그렇게 학생들을 아는 데에서 교육이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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