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통해 남을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은 쓰러져 죽어있던 저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어요.”
늦은 나이에 올 대학수학능력시험(23일)을 준비하는 하옥순(37ㆍ여)씨. 21일 서울 논현동의 한 교회에서 만난 하씨는 여느 수험생처럼 막바지 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휠체어에 의지한 게 눈에 띌 뿐이었다.
“주위 분들은 사고로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했어요.” 하씨는 19살이던 1988년 근무하던 건물이 붕괴돼 척추신경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고, 이후 10년여를 방에 누워서만 지냈다.
2남2녀 중 장녀인 하씨는 고향인 제주 추자도에서 고교에 다니던 중 86년 아버지가 간경화로 사망하자 학교를 중퇴했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조그만 회사에서 받는 월급으로 고향의 가족들을 돕고 있었다.
갑작스런 사고는 하반신 마비 뿐 아니라 건물붕괴로 환상에 시달리는 외상후 스트레스장애, 거식증, 대인기피증까지 몰고 왔다. “혼자 앉기도 힘든 10년 동안은 하루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어요.”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고향의 가족들의 위로를 받으며 견뎌냈다.
하씨가 대학에 가아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거동이 가능하게 된 2003년 교회에서 ‘특수복지 사역팀’을 맡으면서부터. 장애인 노약자 등을 상대로 봉사활동을 하는 이 팀에서 전문가인 사회복지사를 모집했지만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다.
하씨는 “마냥 기다릴 게 아니라 내가 직접 사회복지사가 돼 보자”고 생각했다.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라는 봉사단체에서 2000년부터 장애인 동료들을 상대로 상담활동을 해 온 것도 도움이 됐다.
하씨는 “사고로 집안에만 틀어 박혀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의외로 많았다”며 “이들이 서로의 고민을 털어 놓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공부에 대한 욕심이 생기자 ‘잃어버린 10년’이 너무 아까웠다. 지금도 오전 6시부터 일어나 교회에서 공부를 한다. 효과적인 공부를 위해서는 공공도서관이나 사설 독서실도 좋지만 경사로나 엘리베이터 등 장애인 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는 곳이 별로 없어 쉽지 않다. 장애인 수험생이 겪는 어려움이다.
일부 대학이 실시하고 있는 장애인 특별전형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특별전형을 하는 대학과 모집인원도 적을 뿐 아니라 시각장애인만 뽑는다든지, 검정고시 통과자는 응시를 못한다든지 하는 등 제한이 너무 많았다. 경사로 전용화장실 등 장애인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진 대학도 별로 없었다.
수능원서를 접수했던 서울 강남교육청은 엘리베이터도 없는데 접수창구가 5층에 있었다. “장애인들이 우리나라에서 공부를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했어요. 당당히 실력으로 입학해 대학이 장애인에게 문턱을 낮추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하씨는 오히려 자신보다 나이어린 비장애 수험생들이 더 걱정이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던 그들이 저는 부럽기만 했어요. 그런데 수능시험 때문에 저보다 더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워요. 인생의 목표를 제대로 세울 수 있도록 다른 경험을 많이 할 수 있게 해 줘야 하는데 사회는 성적만 강조하고 있으니….” 하씨는 23일 모든 수험생들이 기쁜 표정으로 시험을 마칠 수 있도록 기도하겠다며 밝게 웃었다.
신기해기자 shink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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