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귀신이나,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신선과 고승의 기이한 옛 이야기는 현대인에게 적지 않은 호기심과 즐거움을 준다. 검증되지 않으면 믿지 않는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 논리만을 강요 받는 현대인들이 옛 사람의 신기한 일들을 일상의 탈출구로 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명나라 때 세간에 떠도는 신이(神異)한 이야기를 포송령(蒲松齡)이 문자로 옮긴 ‘요재지이’(聊齋志異)가 중국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어 꾸준히 읽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조선 후기 송시열의 문인으로 공조판서를 지낸 임방의 ‘천예록’(天倪錄)도 ‘요재지이’처럼 ‘전설의 고항’이나 ‘전설 따라 삼천리’에 나왔을 만한 당대의 별스러운 이야기들을 담고있다.
‘천예’(天倪)는 하늘의 끝 또는 자연의 분기를 뜻하는 말로 인간계와 선계사이에 위치한 상상의 장소이다. 즉 ‘천예록’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초자연적 현상이나 인간 세상의 신기한 일들을 기록했음을 의미한다. 제목에 걸맞게 책은 당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전우치 윤세평 장도령과 같은 인물들의 신출귀몰한 이야기와 귀신과 요괴에 얽힌 괴담을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펼쳐낸다.
기녀를 업신여기다가 알몸이 되어 창피를 당하는 관리, 사나운 아내에게 볼기를 맞고 수염까지 잘리는 남편, 무당에게 홀린 원님 등 당대의 세태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도 함께 담겨있다. 그저 현대인의 흥미를 자극하는 괴이한 이야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옛 사람들의 살던 모습을 생동감 넘치는 풍속도처럼 현대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62개의 이야기를 한문으로 풀어낸 ‘천예록’은 원본은 사라지고 6가지 이본(異本)만이 남아있다. ‘고금소총’과 ‘명엽지해’ 등 후대에 나온 소설이나 야담집에 큰 영향을 미쳤음에도 우리에게도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고, 번역본도 많지 않다.
정환국 성균관대 교수가 펴낸 ‘교감역주 천예록’은 꼼꼼한 손길로 역사에 묻혀있던 ‘천예록’을 한글로 되살려 낸다.
여러 판본의 원문 하나하나를 비교해서 원전에 가깝게 복원하고 이를 다시 현대어로 옮기는 작업인 교감역주(交監譯註)라는 말에서 짐작 할 수 있듯 정 교수는 6개의 각기 다른 ‘천예록’을 대조해 새로운 정본을 만들었다.
61개의 이야기를 수록해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지만 오ㆍ탈자가 많은 일본 덴리대(天理大) 도서관 소장본과 수록된 이야기는 적지만 오ㆍ탈자가 적은 문우서림 김영복 대표의 소장본을 큰 뼈대로 삼고 나머지 4개 본으로 살을 보탰다.
홀대 받던 고서의 복권에만 그치지않고 정 교수는 ‘천예록’의 대중화를 위해 ‘교감역주 천예록’의 이란성 쌍둥이 동생 격인 ‘조선의 신선과 귀신 이야기’도 함께 내놓았다.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읽는 재미가 특별한 28편을 골라 문체를 부드럽게 다듬고 옛 그림도 더불어 담았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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