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이 불쌍하다. 농업인의 날(11일)에 농약을 먹고 자살한 30대의 젊은 농업인, 그의 죽음에서 농촌의 비애를 본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남긴 유서에는 농촌의 암울한 현재와 미래가 쓰여 있다. 농사를 지어선 먹고 살기 어렵다는 사실 못지않게, 이런 농촌의 절박한 사정을 진정으로 듣고 대안을 마련해 줄 우군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절망감 같은 것이다.
쌀시장 보호의 마지막 빗장인 추곡수매제가 허물어졌다. 쌀값은 떨어졌고 장래 얼마나 더 떨어질지 모른다. 상당 기간 예고되어온 일이지만 도시인도 따라잡기 어려운 세계화의 환경변화 속도를 우리 농촌이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까. 농림 관계 공무원들은 부처의 이름을 바꿔서라도 살아 남으려고 하지만, 농민은 그렇게 비빌 언덕도 없으니 막막하다.
●슬픈 농촌의 모습들
도시가 아닌 농촌에서 일어나는 국제결혼 러시, 농사짓는 총각들은 이제 결혼할 동네 처녀도 찾을 수 없어 선 보러 베트남으로, 필리핀으로, 우즈베키스탄으로 지참금 마련하고 가야 한다.
말과 문화정서가 전혀 다른 외국 여자와 벼락치기 결혼을 해야 하는 농촌 젊은이의 신세가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이들이 낳은 자녀들이 자라면서 겪을 농촌 가정과 사회의 고민은 또 얼마나 깊을지 모른다.
고령화는 농촌에 더 급격히 닥쳐왔다. 애 울음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은 농촌은 활기를 잃은 지 오래다. 학교는 하나 둘 폐교되고, 동네 골목은 아이들이 돌아다니는 모습 대신, 머리에 두건 쓴 사람들이 더 자주 눈에 뜨인다.
농촌을 슬프게 하는 것은 떠나가는 우군들이다. 도시화의 1세대가 사회 뒷전으로 물러나면서 새로 등장한 대도시의 젊은이들은 농촌을 고향으로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대도시 사회 또는 글로벌 사회를 향한 동경심과 정서가 강하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대도시 지역구 국회 의원들은 농촌에 정서적 연대감을 가졌다. 그들의 유권자들이 농촌정서를 가진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정치적 우군은 급격히 줄고 있다. 새로운 세대의 정치인들은 집단성이 강하고 유권자도 많은 도시노동자 사회의 정서에 더욱 익숙해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농촌보다는 공장 또는 서비스 노동자들의 정서와 이익을 대변하려 한다.
우리의 경제를 세계 10위 권에 올려놓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대기업 역시 이제 농촌의 편에서 멀어지고 있다. 제품의 2/3 이상을 해외시장에 파는 대기업들은 농산물 수입문제가 무역 마찰의 원인이 되면 농업이 양보하기를 강력히 요구한다. 경쟁력 있는 부분은 살리고 경쟁력 없는 부분은 물러나게 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하지 않느냐는 논리가 점차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가고 있다.
세계시장에서 선두 경쟁력을 확보한 삼성전자. 2004년 2,300명의 박사를 포함한 6만2,000명의 종업원이 일하여 올린 매출액은 약 58조원으로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의 7.4% 규모다. 그런데 같은 해 우리나라 124만 농가의 농산물 생산량은 삼성전자 매출액의 62%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쌀 생산량은 삼성전자 반도체 매출액의 절반 수준이다. 그것도 쌀값을 국제시가의 수배가 비싼 국내 가격으로 쳤을 때의 계산이다.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기업의 위력과 농업의 왜소함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농업 살릴 방법 없을까
세계화로 전세계 농촌이 큰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농촌이 피폐한 선진국은 없다는 점이다. 국가적 역량을 가다듬어 농업을 보호했거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힘을 길렀다.
그럼에도 우리 농촌은 그럴 준비를 하지 못한 채 큰 바람에 휩쓸리고 있다. 반세계화 운동이 거세지만 그 물줄기를 거슬리기에는 너무 깊은 흐름 속에 들어가 있다.
소설가 이순원씨는 한국일보에 연재하는 ‘길 위의 이야기’ (15일자)에서 쌀이 하늘이었던 시절을 회상하며 현재 벌어지는 안타까운 농촌현실을 향해 ‘눈물이 난다”고 썼다. 정말 무슨 방법을 찾지 않으면, 농촌은 농업실업자가 넘치는 절망의 땅이 될지도 모른다.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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