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엘 푸익(1932~1990)은 ‘거미여인의 키스’ ‘조그만 입술’ 등으로 꽤 알려진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다. 젊어서 영화를 공부해 시나리오를 썼지만 빛을 못 보고, 훗날 소설을 통해 영화를 ‘배후조종’한 이력으로 유명하다.
이번 소설은 왕자웨이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에, 서사가 아닌 모티프로, 내용이 아닌 형식으로 개입한 작품으로, 그 제목이 먼저 알려진 작품이다.
“성(性)에 대한 금기에 저항하고, 모든 터부에 도전하고자 쓴다”던 그는, 전작들에서 성과 사랑에 대한 허구적 환상 혹은 육체적ㆍ성적 억압의 허울을 까발린 바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보다 근원적인 욕망의 문제를, 특유의 현란한 서사기법 변주와 추리 소설적 장치들로 긴박하게 파고 든다.
남대서양의 조그만 휴양지 블랑카 해변. 신경쇠약증에 걸려 요양하던 34살의 재능 있는 여성 화가 ‘글라디스’가 실종된다. 그러니까 소설은, 단순히 보자면, 그 사건의 배경과 전모, 사건에 개입하는 여러 인물들의 트라우마와 사회적ㆍ정치적 배경 등에 대한 해명을 거쳐 결말을 규명하는 과정의 이야기다.
시인으로서의 삶에 실패한 데 대한 좌절감을 딸을 통해 극복하려는 글라디스의 엄마 ‘클라라’, 10대 시절 남자 모델의 발기한 성기를 목도(!)하고 ‘한 남자에 의해 소유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의미하는지’(45쪽) 뼈저리게 선체험하는 글라디스. 그녀는 뒷날 성폭행을 당하고 왼쪽 눈을 실명한 뒤 여성성에 대한 상처 입은 자의식에 시달린다.
가끔 섹스에서 ‘건강한 환희’를 느끼지만 섹스결핍은 불면증과 편두통, 채워지지 않는 성적 환상에의 갈증을 남긴다. 그녀의 삶에 유능한 예술비평가 ‘레오’가 끼어든다.
그 역시 비대한 성기로 인해 굴절된 성적 환상에 사로잡힌 존재. 소설은 두 사람의 유년과 성장기, 만남과 갈등의 과정을 좇아가며 왜곡ㆍ억압된 성적 욕망이 연출하는 변태적 성행위와 폭력 억압의 과정들을 때로는 적나라하게, 때로는 모호하게 펼친다.
시계열을 무시한 서사 전개와 전화통화 인터뷰 해부보고서 등 전변하는 서술 방식은 왕자웨이 영화의 시퀀스 전환처럼 경쾌하고 집요하다.
또 신문기사 형식으로 군데군데 던져놓은 페론 군사정부하의 다기한 사건들, 소제목으로 서사를 이으며 그 내용은 맥락 불명의 시적 환상으로 버무린 실험적 서사전개로 작가는 독자의 쉬운 이해를 방해하며 의식 속으로 깊이 파고든다.
이 작품의 성적 묘사들이 지닌 ‘위험한 힘’(번역자 해설)은 발표(1973년)된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위험하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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