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 라고 역사학자 E.H. 카가 갈파했듯이, 과거는 언제나 현재에 말을 걸어온다. 화해에 이르든 논쟁으로 발전하든, 그 대화를 피할 수는 없다. 14일에는 현역 음악인들이 ‘홍난파 현제명 등 근대음악 개척자들을 친일파로 매도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세미나가 열렸다.
‘전시 국민가요’를 작곡하고 ‘후생악단’을 만들어 활동한 건 사실이나, 살아 남기 위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좋은 것이 99.9%인데 0.1%의 티끌을 잡아내 친일파로 몰았다는 말도 나왔다. 진정 그렇다면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 반면 15일 수원지법에서는 의미 깊은 판결이 나왔다. 친일파 이근호 손자의 토지반환 소송을 각하 시킨 것이다. 판결문은 3ㆍ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는 헌법 정신을 근거로 했다.
친일파 후손의 재산 환수소송과 같은 반민족행위는 헌정질서 파괴나 다를 바 없어 위헌성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재산권을 보장한 법률과 상충되기 때문에 특별법 제정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
▦ 어제는 우리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긴 을사늑약 100주년의 날이었다. 일제 때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가운데, 백범 김구의 러브스토리를 다루는 한중합작 영화가 화제다. 50대의 백범과 20대의 중국 처녀 뱃사공의 애련이 영화로 만들어진다. 1930년대 백범은 일경에 쫓겨 중국 저장(浙江)성으로 피신한다.
상인행세를 하며 처녀뱃사공 주아이바오(朱愛寶)와 위장결혼을 한다. 여인은 “보답을 생각하지 않아요. 평생 선생님을 위해 노를 젓겠어요”라며 학식 높은 남편을 존경한다. 그 역시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 시나리오는 중국 여류작가 샤녠성이 쓴 것이다. 사랑은 길지 못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부부 비슷한 관계도 생겨, 내게 대한 공로란 적지 아니한데…’라고 여인을 안타깝게 회상한다.
풍찬노숙하던 백범의 독립운동사에서 이 대목은 중요한 로맨스를 이룬다. 법통을 거슬러올라가면 백범은 임시정부 주석, 즉 대통령에 해당한다. 그는 “남경을 떠날 때 주애보를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두고두고 후회하는 것은 여비 100원만 준 일”이라고 적고 있다. 백범의 인간적이고 큰 그릇이 부박한 세태와 비견되어 한층 커 보인다.
박래부 수석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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