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는지 모르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 자택 응접실에는 ‘윤집궐중’(允執厥中)이란 멋들어진 행서체의 편액이 걸려 있었다. 요(堯)가 순(舜)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당부했다는, “진실로 그 가운데를 잡으라(允執其中)”는 말이다. 동양적 이상사회의 대명사인 ‘요ㆍ순 시대’의 초석이 된 치세의 이념이다.
●설명력 없는 도덕적 만용
이를 줄인 집중(執中)은 자기 중심에 가만히 머무는 것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중용’(中庸)의 표현을 빌리자면, 희로애락이 발하지 않은 정태적 중(中)보다는 희로애락이 발한 가운데 균형을 잡아가는 동태적 화(和)에 가깝다. 적극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찾으려는 노력을 강조한 말이다.
김 전 대통령만큼 이 집중의 묘를 잘 살린 정치인도 드물다. 우선 이름부터 ‘크게 배워(大學) 중용에 이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그의 집중은 민주화 후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이후에 빛을 발했다. 오랜 세월을 독재 권력과 싸우며 민주화 열망을 이끈 사회지도자라는 이미지만으로는 ‘정치인 DJ’의 최종 목표인 대선 승리에는 이르지 못했다.
정책이나 이념, 지지 기반 등이 어딘지 치우쳐 있다는 국민 일반의 인식을 지워야 했다. 적극적으로 가운데를 찾아가려는 노력을 거듭했고, 그에 힘입어 마침내 그는 대통령이 됐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그는 ‘집중’을 소중히 여겼다. 경제정책이 ‘대중경제론’에서 신자유주의로 접근해 간 것이 대표적이다. 그가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존경 받는 정치지도자로 남을 수 있었던 것도 치우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중심과 균형을 잡으려고 했던 노력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 그가 국정원 도청 사건을 두고 적극적 중용은커녕 소극적 중용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자신이 임명한 국정원장에게 여러 차례 도청 근절을 지시했고, 확답을 받았다는 것이 논거다. 누구나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상식을 “눈을 보면 다 알 수 있다”는 말로 반박했다.
자신의 도덕성과 사람 보는 눈에 대한 자기 확신의 피력일 수는 있다. 그러나 자신까지 포함된 도청 대상자 명단이 드러나고 있는 마당에 아무런 객관적 설명력이 없는 자기 확신을 들이대는 것은 잘해야 도덕적 만용이다.
애초에 김 전 대통령이 취할 태도는 두 가지였다. “전혀 알지 못했던 일이어서 놀라고 있지만 조용히 수사를 지켜보겠다”거나, “지금도 믿어지지 않지만 국정의 최고책임을 졌던 사람으로서 국가기관의 범죄 행위에 대해 도덕적 책임감을 느끼고 사죄한다” 정도였다. 후자의 적극적 중용이라면 더욱 좋았겠지만 최소한 전자의 소극적 중용은 지켜야 했다.
그랬으면 두 전직 국정원장의 구속이 정치권을 온통 흔들어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사태도 빚어지지 않았다. 한창 열린우리당과 그의 신임을 다투던 민주당은 절호의 기회를 맞은 듯 노무현 대통령 정부의 음모까지 거론하고 나섰다.
열린우리당의 어정쩡한 자세는 더욱 꼴불견이다. 정상적인 정부라면 엄청난 국가범죄에 대해 마땅히 국민에게 사죄하고, 확고한 재발방지책과 피해자에 대한 상징적 보상책이라도 내놓아야 한다. 따라서 제대로 된 여당이라면 정부의 이런 노력을 지원하고, 정부가 할 일을 잊고 있다면 적극적 대응을 촉구해야 한다.
●진실로 가운데를 잡으라!
김 전 대통령이 현재의 자세를 고집하는 한 이런 정상적 국가운영의 모습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따라 움직이는 세력기반이 존재한다고 믿는 민주당과 정부ㆍ여당의 정치적 계산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정치행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늦지 않다. 김 전 대통령이 국정원 도청 범죄와 분명한 선을 긋기만 하면 정치권의 두서 없는 잡음이 멎고, 신속하고 정확한 수사 분위기도 조성될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존경할 만한 전직 대통령으로 남는 명예의 길이자 궁극적으로 국민의 혼란을 씻는 위민의 길이다. 윤집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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