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루 14~16건 두차례 도청 보고받아
15일 발부된 임동원, 신건 전 국정원장 구속영장에는 국정원의 광범위한 도청과 정치사찰 실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영장에 따르면 국정원은 ‘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R2)’를 이용, 처음에는 모든 통화내용을 무작위로 도청하다가 도청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대통령의 친·인척을 비롯해 여야 정치인, 경제인, 고위공직자, 언론인 등 국내 주요인사의 휴대폰 전화번호 1,800여개를 미리 입력한 뒤 상시 도청했다.
이렇게 수집된 도청 정보는 중요도에 따라 AㆍB급으로 분류해 국내담당 차장에게는 하루 14~16건의 A·B급 내용이, 국정원장에게는 하루 6~10건의 A급 내용만 보고됐다. 검찰은 두 전 국정원장이 출근 직후와 퇴근 직전, 하루 2차례 보고를 받았다고 밝혔다.
새로운 도청사례 구속영장에는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의 영장 및 공소장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새로운 도청 사례들이 명시됐다. 우선 임동원씨가
신건씨 재직 시절(2001년 3월~2003년 4월)에도 안동수 법무장관 임명 때 민주당 관계자의 ‘인사시스템 문제의 심각성’ 관련 통화내용을, 2001년 8월 한나라당 박종웅 의원의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한 항의 단식 농성’ 통화내용을 도청했다.
또 2002년 1월 박지원 청와대 정책기획수석과 박준영 국정홍보처장의 ‘취업알선’ 통화 내용을 도청했다. 같은 해 3월 한나라당 김모 의원과 모 일간지 기자 간 ‘이회창 총재의 당내 인적쇄신 요청’ 관련 내용, 민주당 이인제 고문과 전용학 의원의 ‘민주당 경선’ 관련 내용, 한나라당 관계자와 하모 의원의 ‘한나라당과 자민련 합당’관련 내용도 도청했다.
임동원씨 적극 독려 검찰은 신씨보다 임씨 혐의 입증에 무게를 실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임씨가 남북정상회담 등 대북사업을 주도하며 ‘햇볕정책의 전도사’ 역할을 한 점을 감안해 임씨는 불구속 수사해야 한다는 정치권의 주장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신씨는 국정원 직원들이 도청한 정보를 보고 받은 것으로 돼있는 반면, 임씨는 직접 도청을 독려·지시한 정황까지 영장에 구체적으로 기재됐다.
검찰은 2000년 10월 말 햇볕정책을 비판한 인사에 대해 임씨가 “집중적으로 첩보를 수집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대통령 아들과 친분을 유지하며 각종 이권에 개입한 최규선씨에 대해서도 직접 ‘내사’ 지시를 내렸다고 명시했다.
임씨는 또 같은 해 12월 민주당 소장파 의원들이 권노갑 최고위원의 퇴진을 거론하자 “민주당 내분사태가 심각하니 유심히 체크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검찰은 파악했다.
검찰은 이와 함께 이례적으로 공소시효(2000년 10월 말) 이전 도청 사례도 임씨 구속영장에서 밝혔다. 임씨는 2000년 4월 국회의원 총선 출마자들 및 대통령을 비판한 이도형 한국논단 사장에 대한 첩보, 그 해 현대그룹 ‘왕자의 난’ 및 의약분업 사태 등에 대해서도 도청 첩보를 수집했다고 적었다.
검찰 입장 표명 검찰은 이날 두 전 국정원장 구속에 대한 정치권의 비판에 대해 “구속영장 청구까지 많은 고심을 했다”고 밝혔다. 황교안 서울중앙지검 2차장은 “개인적으로 국정원은 중요한 조직이라고 생각한다”며 “공(功)도 많은데 과(過)만 부각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두 전 국정원장에 대해서도 “두 분이 잘못만 한 건 아니다. 대단한 일을 많이 하신 분들인데 수사를 하게 돼 안타깝고, 구속영장을 청구할 정도로 불법사실이 확인됐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고 덧붙였다.
김지성 기자 jskim@hk.co.kr
■ 검찰 재수사끝에 역전승
임동원, 신건씨의 구속까지 몰고 온 국정원 도청 사건은 검찰의 명예회복과도 맞물린 문제였다. 숱한 의혹에도 불구하고 휴대폰 도청 사실을 전면 부인했던 국정원에 속아 검찰은 올 4월 한 차례 면죄부를 준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도청사건 수사를 총 지휘한 황교안 서울중앙지검 2차장은 2002년 당시 서울지검 공안2부장으로서 한나라당이 공개한 도청문건에서 촉발된 국정원 도청사건을 직접 수사했다.
검찰은 이번 수사에서도 처음부터 도청을 감추려는 당시 감청부서 직원들과 ‘숨바꼭질’을 거듭해야 했다. 명예회복의 기회는 8월5일 안기부 미림팀 실태보고를 발표한 국정원이 김대중 정부 시절 휴대폰 도청사실도 함께 고백하면서 찾아왔다.
하지만 국정원 발표에는 ‘누가, 언제, 어떻게, 누구를’ 도청했다는 사실이 빠져 있어 수사가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다. 국정원도 “관행을 벗지 못한 일부 직원들의 답습 수준이었다”고 애써 의미를 축소했다.
그러나 정공법으로 승부에 나선 검찰은 국정원 발표에서 누락된 사실관계를 하나씩 밝혀나가면서 국정원 직원들을 압박, 윗선으로 수사망을 좁혀갔다.
그 결과 8국(과학보안국) 내에 R2(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 수집팀이란 전담 도청팀이 있었고, 주요 전화국 유선중계통신망을 무더기로 끌어다 주요 인사의 휴대폰 번호를 임의로 입력하고 3교대로 24시간 내내 무작위 도청한 구체적 실태를 밝혀냈다.
검찰은 전직 8국장과 김은성·이수일 전 국내담당 차장의 입도 열었다. “국정원장들이 매일 1~2건의 통신첩보 보고서를 받아봤다”는 이들의 증언은 전직 원장 사법처리의 발판이 됐다.
마지막 장애물은 DJ 시절 핵심 실세였던 두 사람 구속이 몰고 올 정치적 파장이었다. 검찰 수뇌부는 고심했지만, 수사팀은 “책임자들이 부인한다고 실무자만 처벌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원칙론을 폈다.
사상 초유의 전직 국가정보기관 총수 2명 동시 구속은 검찰이 수 년에 걸친 국정원 도청라인과의 줄다리기끝에 따낸 힘겨운 역전승이었다.
김영화 기자 yaaho@hk.co.kr
■ 두사람 모두 혐의 부인
15일 오후 10시30분께 서울중앙지법에서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임동원, 신건 전 국가정보원장은 대기 중이던 서울중앙지검에서 1시간쯤 뒤 영장이 집행됐다. 그러나 이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혐의를 부인했다.
임씨는 오후 11시25분께 구치소로 향하면서 “국민들에게 국정원 도청사건으로 심려를 끼쳐 드려서 죄송하다”며 “재직 기간 동안 불법 감청을 적발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한데 책임을 느낀다”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불법 감청에 관여한 혐의를 인정하지는 않았다.
5분쯤 뒤 역시 구치소로 향한 신씨도 혐의를 강하게 부인했다. 신씨는 “불법 감청을 지시한 적도 없고 결과물을 보고받은 적도 없다”며 “따라서 검찰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서도 이들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를 극구 부인했다. 이날 심리는 김득환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오후 2시부터 신씨에 대해, 오후 4시 임씨에 대해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신씨가 본안 재판을 방불케 할 정도로 4시간 30여분 동안 검찰과 공방을 벌이면서 임씨에 대한 영장심사는 오후 5시 45분께부터 박철 영장전담 부장판사 심리로 다른 법정에서 진행됐다.
오후 1시45분께 비교적 여유 있는 표정으로 법정에 나온 신씨는 검찰 신문에 조목조목 반박하며 혐의를 부인했다. 신씨측의 김옥철 변호사는 “검찰이 1개를 질문하면 신 전 원장이 10개를 답하는 식일 정도로 신씨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진술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영장실질심사는 비공개로 진행됐으며, 중간중간 “내가 그랬으면 말이야… 아니야” 등 신씨의 높은 목소리가 법정 밖으로 새나오기도 했다.
임씨는 신씨의 영장심사가 늦어져 예정된 시간보다 1시간 30여분 늦게 황상현 변호사 등 변호사 4명과 함께 법정에 나왔다. 임씨는 법정에 출석할 때와 나올 때 모두 “국민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려서 죄송하다”며 연신 사과했다.
하지만 황 변호사는 “임씨의 입장은 불법 감청 내용을 지시한 적도 보고 받은 적도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임씨에 대한 영장심사는 신씨와 달리 시작한 지 2시간 만에 끝났다.
최영윤 기자 daln6p@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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