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이 신건ㆍ임동원 두 전직국정원장의 구속에 대해 마침내 공개적 반기를 들었다. 16일 민주당 한화갑 대표 등과의 면담에서 한 “(현 정권이) 지금 무리한 일을 하고 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억지로 만들고 있다”는 말은 검찰의 기소내용을 원천 부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현 정권과 검찰에 대해 김 전 대통령이 품고 있는 노기(怒氣)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발언이자, 향후 정권과 김 전 대통령측 관계가 가파른 대립으로 전개될 밖에 없음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김 전 대통령은 “내 마누라는 속일 수 있어도 거울 속에 비친 내 눈은 속일 수 없다”며 “반드시 이번 일의 흑백이 가려질 것이며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이 갖고 있는 호남 등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감안할 때 그의 이날 발언은 일파만파의 정치적 파장을 부를 것으로 예상된다.
무엇보다 내년 지방선거나 차기 총선 등에서 입지가 불안해진 우리당의 호남 출신이나 일부 수도권 의원들이 동요할 가능성이 높다. 주로 이들이 검찰 공격에 앞장서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여기에 민주당과의 통합문제가 다시 불거져 친노(親盧)와 비노(非盧) 세력간 충돌이 표면화할 개연성도 있다. 우리당 내 큰 흐름은 통합 찬성쪽이어서 14일 사실상 통합반대 의사를 표명한 노무현 대통령과 전선이 형성될 지 모른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이 같은 정면대응은 자칫 민주주의와 인권옹호의 수호자로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한 그의 도덕성이 도청파문으로 송두리째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출발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도 있고 별일 다 있다. 그런 세상을 살아왔다”는 자조적 표현으로 노무현 정부에 대한 극도의 배신감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김 전 대통령과 노 대통령은 참여정부 출범이후 정치적 상황이 얽히면서 두 사람의 의도와 무관하게 악연으로 점철됐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을 불과 열흘 앞두고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는 등 사실상 읍소했지만, 석 달 뒤 노 대통령은 대북송금 특검법을 수용해 김 전 대통령을 궁지로 몰았다. 또 그 해 11월 김 전 대통령이 민주당이 분당되면서 우리당이 창당됐다.
그러나 도청파문의 충격파는 두 사건과 차원이 다르다. 대북송금만 해도 “남북관계의 특수성과 국익을 위해 불가피했다”고 호소할 수 있었다. 반면 도청파문은 그가 평생 살아온 삶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건이다.
이번 일로 양측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으로 보인다. 김 전 대통령의 한 측근은 “당신 건강만 좋았으면 정권 타도운동에라도 나서고 싶을 심정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북송금 특검 발표 직후인 2003년 8월 김 전 대통령이 퇴임후 첫 강연에서 맹자를 인용하며 ‘임금이 선정을 하지않고 백성을 괴롭히면 임금을 추방할 권리가 있다’고 했던 것을 기억해보라”며 “지금 심경은 그때에 비할 게 아니다”고 전했다.
이동국 기자 eas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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