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임동원, 신건 전 국정원장의 구속영장에서 밝힌 국정원 도청 사례를 보면, 그 대상에는 대통령 친인척에서부터 정치인 경제인 고위공직자 언론인 등 각계 인사가 총 망라돼 있다. 전직 대통령마저 도청 대상이 됐다. 피아(彼我)의 구분도 없었다. 말 그대로 ‘무차별 도청’이다. 하지만 드러난 사례들은 검찰이 증거를 확보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전직 대통령도 도청 국정원은 2001년 8월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한나라당 박종웅 의원의 통화내용을 도청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언론사 세무조사에 항의해 단식 농성에 들어간 박 의원에게 격려 전화를 했는데 그 내용이 도청된 것이다.
국정원이 김 전 대통령의 전화를 도청하고 있었는지, 박 의원의 전화를 도청하고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도청 대상이 1,800여명에 달했다고 하니 전직 대통령들이라고 도청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을 듯하다.
국정원은 야당 정치인 뿐 아니라 박지원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박재규 통일부 장관 등 당시 정권 실세 및 고위 공직자도 표적으로 삼았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박지원씨는 박준영 국정홍보처장에게 “술집 여종업원을 취직시켜 준 것에 대해 나쁜 소문이 돌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박재규 장관의 경우 ‘햇볕정책의 전도사’ 역할을 한 임동원씨가 개인적인 관심 때문에 도청했다고 한다.
도청 내용이 국가안보, 수사 등 국정원 본연의 업무와 무관한 것은 물론이다. 거의 대부분이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심지어 금전관계와 여자관계까지 수집하는 등 그 수준이 증권가 사설정보지를 방불케 했다.
그 해 10대 뉴스? 이번에 드러난 도청 사례만으로도 그 해 ‘10대 뉴스’를 구성하기에 충분하다. 실제로 2000년 정몽헌(2003년 사망) 현대아산 회장 등 현대 고위 관계자들(현대그룹 ‘왕자의 난’), 의사ㆍ약사협회 간부(의약분업 사태), 김대중 대통령의 처조카 이형택씨(이용호 게이트), 진승현 MCI코리아 부회장(진승현 게이트), 한나라당 강삼재 의원(안풍(安風) 사건), 2000~2001년 대통령 아들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각종 이권에 개입한 최규선씨(최규선 게이트), 2002년 민주당 이인제 고문(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등에 대한 도청은 매년 말 언론을 장식한 ‘올해의 주요 뉴스’였다.
정보기관의 특성상 국정원이 굵직한 사건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측면도 있지만, 검찰이 도청 사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검찰은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 등 도청 관련자들을 상대로 국정원이 도청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주요 정치ㆍ사회 현안을 일일이 제시하며 도청 여부를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나라당 폭로 내용과 유사 2002년 11~12월 한나라당 김영일, 이부영 의원 등이 폭로한 내용과 유사한 것들도 있다. 당시 김 의원 등은 “국정원 도청 문건”이라며 30여건의 사례를 공개한 바 있다.
이 가운데 2002년 박준영씨의 취업 알선, 한나라당 의원과 일간지 기자의 통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과 관련한 민주당 이인제 고문의 통화 내용 등은 이번에 검찰이 밝힌 도청 내용과 흡사하다. 김 의원 등이 국정원 내부 직원을 통해 확보한 실제 도청 자료임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통신비밀보호법은 도청내용을 유출하거나 공개한 자도 처벌하도록 하고 있어 이들에 대한 검찰 수사가 주목된다.
김지성기자 j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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