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 시절 국정원의 상시 도청 사실이 밝혀지면서 한나라당이 2002년 폭로한 도청문건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당시 한나라당의 김영일 사무총장, 이부영 의원(대선 후 열린우리당 입당), 정형근 의원이 공개한 문건 내용이 모두 사실로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으로 보면 한나라당은 강공을 가할 수 있는 엄청난 호재를 만난 셈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16일 가급적 공세를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전여옥 대변인이 “검찰이 역사적 진실을 밝혀낼 시험대에 올랐다”며 공세의 표적을 노무현 정권에 맞추었을 뿐이다. 박근혜 대표와 강재섭 원내대표는‘도청’이란 말을 아예 꺼내지 않았다.
이는 한나라당 역시 도청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검찰이 이날 홍석현 전 주미대사를 소환, ‘안기부 X파일’에 대한 수사를 하고 있어 YS정권 시절의 미림팀 도청이 다시 부각될 가능성이 높다. 한 당직자는 “한나라당이 이번 일에 강경하게 대응한다면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비난이 올 수 있다”고 말했다.
2002년 공개한 도청문건의 부메랑 가능성도 부담이다. 당내에선 “검찰이 형평성 차원에서 국정원의 도청 뿐 아니라 도청문건의 유출경로를 조사, 한나라당에도 칼을 댈 수 있다”는 우려가 많다. 도청 자료임을 알면서 이를 공개하는 행위는 통신비밀보호법에 의한 처벌대상이다.
2002년 도청 문건은 한화의 대한생명 인수, 민주당 경선, 한나라당의 당권ㆍ대권 분리 등 당시 정치현안과 관련한 정치인, 언론인, 공직자간 은밀한 대화를 담고 있다.
공개된 문건 외에도 상당한 양의 도청 문건이 더 있었지만, 대선 막판 ‘흑색선전’이란 여당의 역공세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공개하지 않았다. 이에 관여했던 한 관계자는 “이회창 전 총재를 도청한 내용 등 공개하지 않은 자료가 있었다”며 “모든 자료들은 대선 패배 후 폐기했다”고 밝혔다.
문제는 한나라당 관계자들이 불법도청 자료임을 인지했는지 여부. 당시 이 전 총재의 한 측근은 “국정원 내부인사가 도청 내용을 필사본으로 만들어 나와 전달해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부영 전 의원은 “자료를 김 전 사무총장으로부터 받았지만, 정형근 의원이 어떤 방식으로든 관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정 의원은 “국정원의 불법사실을 야당이 공개하는 것은 기본적인 의무”라면서 “전달 경로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당시 공세의 무기였던 도청 문건이 이제는 한나라당의 뒷덜미를 은근히 잡아당기고 있는 것이다.
권혁범기자 hb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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