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택수(55)의 첫 시집 ‘폭우와 어둠 저 너머 시’(이하 ‘폭우와 어둠’. 1990년)에 묶인 작품들은, 시인의 자서(自序)에 따르면, 30대 후반의 네 해 동안 쓰여졌다. 말하자면 이 시집에는 이미 청년기를 훌쩍 넘기고 중년을 눈앞에 둔 사내가 20세기의 저물녘에 겪은 마음의 행로가 담겼다.
이런 텍스트외적(外的) 정보를 마음에 담고 이 시집을 읽을 때, 독자들에게 대뜸 다가오는 것은 그 반(反)시대성과 반(反)세대성이다. 마음 여린 화자들이 보여주는, 시(詩)에 대한 막무가내의 경배는 이 시집을 두 세기 전 낭만주의가 태동할 무렵 독일쯤 되는 곳의 청년 시인이 낸 시집처럼 보이게 만든다.
가수 심수봉이 “사랑밖엔 난 몰라”라고 노래했듯, ‘폭우와 어둠’의 화자들은 “시밖엔 난 몰라”라고 노래하고 있다. 여기서, ‘화자들’이라는 표현은 ‘화자’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폭우와 어둠’의 서정적 자아들은 죄다 같은 사람인 듯하고, 그는 바로 시인 자신인 듯하기 때문이다.
시에 대한 이 시대착오적이고 세대착오적인 순애가 ‘폭우와 어둠’을 이끌어 가는 힘이다. 이 순애는 시인 자신과 포개지는 화자를 곧추서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나는 방금 순애에다 純愛의 의미를 담았지만, ‘폭우와 어둠’의 순애는 殉愛이기도 하다. 시에 대한 사랑 없이는, 이 시집의 화자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루어지지 않을 말의 누대(累代)”(‘어둠 속에서’)에 자신을 묶은 채 생을 버텨낸다. 시와의 이 순애는 독자로 하여금 ‘폭우와 어둠’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매력이기도 하다.
거의 고질로까지 보이는 서정적 자아의 어눌함도, 그 어눌한 언어가 드물지 않게 빚어내는 앙상한 관념성도 이 순결하고 숨가쁜 사랑에 압도된 독자에게는 허물로 보일 틈이 없다. 기실, 이 시집에 점점이 박힌 산문적 행들까지를 시로 만드는 계기 하나가 바로 그 사랑의 가쁜 숨결에서 주어진다.
표제작 ‘폭우와 어둠 저 너머 시’의 화자는 비관적으로 단언한다. “인간에겐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삶도 죽음도, 포옹마저도”라고. 그는 “인간에겐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라고 쏟아지는 폭우와 어둠”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 폭우와 어둠을 뚫고 새어나오는 한 줄기 희미한 빛을 발견한다.
그 빛은 “인간에겐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라고 쏟아지는 폭우와 어둠 저 너머 시”다. 시는 불가능을 노래함으로써 아름다워지고, 갠 하늘이 되고, 빛이 된다.
이 시집의 서정적 자아가 보기에, 삶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시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행복하지 않은 삶”도 그것을 노래하는 시가 아름다울 때는 아름답지만(‘이상의 정원 2’), “언어의 실패”와 “언어의 저버림”으로 시와 시인이 아플 때, “삶은 아름답지 않다”(백석의 마을 14).
시의 가장 헌신적인 연인으로서, 화자는 긍지에 차 있다. 그 긍지는 자주 나르시시즘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그 나르시시즘은 패배의식의 뒷면이기도 하다. 시에 대한 사랑은 세속에서 뒤진 자의 사랑이다.
시는 “연인의 이름”이고 “사랑스런 모음(母音)”이지만, 한편으로 “잘못 부른 사랑의 노래”(‘백석의 마을’ 6)이기도 하다. 그럴 때, 시는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 미움이나 저주의 증거”이고, “세상에서 버림받은 이의 그 ‘버림’에 관한 노래”(‘백석의 마을 13’)다. ‘폭우와 어둠’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 가운데 하나에 붙여진 표제처럼 시는 ‘병후(病後)의 노래’일지도 모른다.
“내 청춘 캄캄한 흑염(黑炎) 위에 어둠을 문지르듯/ 어둠 위에 한 겹 검은 구름장 덮여/ 죽음을 받아들이던 밤이여./ 죽음을 받아들이던 병이여./ 병동의 회랑은 깊고 깊었네.” 시가 수태되는 곳은, 얄궂게도, 화자가 끔찍스럽게 되돌아보는 그 ‘깊고 깊은 병동의 회랑’이다. ‘폭우와 어둠’의 낭만주의는 병적 낭만주의다. ‘무덤 앞에서 3’의 화자가 “죽음이여, 삶의 그늘이여”라고 노래할 때, 죽음은 삶의 어두운 반쪽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삶의 가혹한 뙤약볕을 피하기 위한 은신처이기도 하다.
시가 ‘폭우와 어둠’의 유일한 제재(題材)는 아니다. 또 하나의 제재는 가족이다. 시와 가족은 더러 나란히 가며, 때로는 깊숙이 맞물리며 ‘폭우와 어둠’의 공간을 채운다.
이 시집 속의 가족은, 화자를 제외하면, 여성만으로 이뤄져 있다. 그 여성들은 화자의 어머니와 아내와 딸이다. 가족을 등장시킨 시들도, 시를 제재로 삼은 시들처럼, 나르시시즘과 열패감을 오가거나 그 둘을 버무린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사모곡이라 할 ‘어머니 고상(苦像)’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유럽 기독교 미술의 큰 주제였던 ‘피에타(Pieta)’ 속의 성모 마리아를 문득 연상시킨다.
말하자면 이 시(집) 속의 가족은 성가족(聖家族) 같다. 실제의 성가족이 세상에서 핍박받았듯, ‘폭우와 어둠’의 가족에게도 세상은 만만치 않다. “순결한 나?아내”는 “모든 여성들에게서 저버림받은 여인”이고, “나 자신”은 “영원에 대한 갈구(渴求)에 지쳐”(‘세 편의 노래’) 있다.
이 성가족의 유일한 남성인 화자에게, “아버지, 제 딸아이도 저처럼/ 평생 노래하며 살도록 능력 주세요/ 바람불어도 나뭇가지에 내려앉는 새처럼/ 날개 접으며 노래하도록 능력 주세요”(‘이상의 정원 5--기도’)라고 기도하는 그에게, 딸과 시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상상 속에서도 시를 쓰는 ‘나, 자아’를 벗어날 수 없”듯, “딸아이가 없는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백석의 마을 10’). 그러니까, ‘폭우와 어둠’의 화자가 시 쓰며 살아가기의 어려움을 더러 내비친다고 해도, 그것은 시냐 삶이냐의 문제는 아니다. 이 시집의 화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시를 잃고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산다는 것은 시와 더불어, 시 속에서 사는 것이다.
시인은 ‘폭우와 어둠’의 연작시들 몇 다발에 각각 ‘이상(李箱)의 정원’, ‘만해기행(萬海紀行)’, ‘백석(白石)의 마을’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만해기행’의 시 두세 편이 ‘습니다’체와 구도(求道)의 몸가짐으로 만해를 연상시키기는 하지만(예컨대 ‘만해기행 2--생명’의 “나는 조갑지를 주우며 끝없이 바닷가를 걸었습니다.
아침 바다는 휘황한 광명이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빛이요, 소낙비였습니다”), 그리고 ‘이상의 정원’의 어떤 시행들이 이상의 나르시시즘이나 이방인 의식과 줄이 닿아있기는 하지만(예컨대 ‘이상의 정원 3’의 “세상이 잘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바닷가에서 소리치며 자랑하던 시”나 ‘이상의 정원 4’의 “너는 꽃나무를 노래하듯 다만 네 노래의 아름다움을 세워라”, “나는 한국인일까?”), 표제에 이름을 빌려준 시인들과 그 표제 아래 묶인 시들 사이에서 깊숙한 연분을 찾아내기는 어렵다.
그렇더라도, 이상과 만해와 백석이 ‘폭우와 어둠’의 시들을 쓸 무렵의 시인에게 각별한 느낌을 자아냈으리라는 짐작은 할 수 있다. 그들의 어떤 점이 이 후배 시인을 매혹했을까? 생활세계 한복판에서 내쳐졌다는 점에서 ‘폭우와 어둠’의 화자는 이상을 닮은 듯도 하고, 언어에 대한 탐구가 (방향은 다르되) 집요하다는 점에서는 이상과 백석을 동시에 닮은 듯도 하다.
그러나 ‘폭우와 어둠’의 세계가 그 선배 시인들의 세계와 겹치는 부분은 넓지 않다. 이 시집의 아름다움은 스러질 듯한 것의 아름다움이고, 박복(薄福)의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 밑에서 거듭되는 흐느낌과 푸념에 독자의 마음은 편치 않다. 그러나 이 시집의 화자가 “나는 아마 연두빛 청춘을 그렸으나, 나의 삶은 진홍빛 불안이거나 황토빛 가난으로 채색되었”(‘이상의 정원 1’)다고 한탄할 때든, “겨울은 천공(天空)의 순결함을 드러낸다.
푸르게 깊은 물과 구름, 그것들은 내 삶의 순결함을 드러내준다”(‘백석의 마을 7’)고 젠체할 때든, 그 앞에서 눈살을 찌푸릴 필요는 없다. 앞의 한탄은 “살아야 한다!”는 생명의지에 의해, 뒤의 자기애는 “순결함이란 사랑하지 않음은 아닌가? 그것은 세계에 대한 투신(投身)도, 혹은 거부도 아닌 것은 아닌가?”라는 반성에 의해 기우뚱한 균형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폭우와 어둠’은 시의 발생학을 제 몸통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별난 시집이다. 그런데, 시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늘, 고스란히, 시가 될 수 있을까? 그 사랑과 헌신의 깊이가 고스란히 시적 아름다움으로 이월될 수 있을까? ‘폭우와 어둠’의 언어가 더러 성글고 뾰족한 것은, 그 사랑과 헌신의 예술적 이월이 늘 고스란할 수만은 없다는 뜻인 것 같다.
▲ 행과 연
독서를 방해하는 시의 행(行)과 연(聯),
그러나 오, 고귀한 순결.
오후의 졸음처럼 시가 내리는 때
나는 죽고만 싶지.
알몸뚱이 처녀처럼 책장 속에서
졸리운 어느 때.
독서를 방해하는 시의 행과 연,
그러나 오, 고귀한 순결.
한밤의 꿈처럼 눈이 내리는 때
나는 죽음도 잊으리라.
시 속에 스며 있는 오르페우스의 통곡,
나는 울음을 찾아 나서리라.
그러나 오, 독서를 방해하던 시의 행과 연.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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