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 주나라의 국력이 기울어 천자는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하여 자리만 지키는 존재였다. 제후들은 저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고, 주나라의 예법은 붕괴하여 갔다.
노나라 역사책인 ‘춘추’에는 이런 시대를 고민하는 기록이 한 줄 적혀있다. 기원전 711년, 노나라 환공 원년.‘정나라 임금이 벽(璧ㆍ옥)으로 허전 (許田)을 빌렸다’는 기록이다.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먼 옛날 주공(周公)은 주나라의 건국에 지대한 공을 세워 노나라를 받게 되었다. 그가 죽은 후에 주나라 천자는 노나라에 땅을 하사하고 거기에 사당을 세워 주공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런데 그 땅은 정나라와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정나라도 선조인 무공 (武公) 덕택으로 비슷한 이유로 천자에게 땅을 받았는데, 그 땅은 노나라 영역 안에 있었다. 그래서 정나라 임금은 자신이 대신 주공의 제사를 지내겠으니, 서로 땅을 교환하자고 하였다. 노나라는 자기 땅이 더 크기 때문에 응하지 않았다. 정나라는 그 속내를 헤아리고 좋은 옥을 얹어주어 일을 성사시켰다.
천자가 하사한 땅을 제후끼리 마음대로 맞바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노나라는 자기 조상 제사를 다른 나라에 맡긴 것이니 후손으로서 해서는 아니 될 일이었다. 속이 켕기는 개운치 않은 거래였다.
이런 까닭으로 ‘춘추’에서는 차마 영원히 맞바꾸었다고 하지 못하고 잠시 빌렸다고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천자의 토지를 무단으로 맞바꾼 죄, 조상 제사를 남에게 떠넘긴 죄를 희석시켜 모양새를 갖추고 싶었던 것이다.
‘춘추’의 저자로서는 후세에 교훈을 남긴다는 의미에서도 표현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훗날 진나라 두예는 ‘올바른 가르침에 따라 천자에게 순종하는 도리를 보인 것’이라고 이를 칭찬했지만,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일종의 역사 왜곡이고, 곡필(曲筆)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춘추’의 저자는 이 사건을 기록하며 대단히 고심했을 것이다. 적어도 다음 세 가지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서로 바꾸었다’, ‘우리가 빌려줬다’, ‘정나라가 빌렸다’. 편하게 생각하면, 사실 그대로 적는다 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춘추’는 차마 그렇게 쓰지 못했다. 왜곡이든 곡필이든 예법을 끌어안고 지키고자 했던 ‘춘추’가 아직까지 전해져서 다행이다.
박성진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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