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로가 공자님에게 여쭈었습니다.
“죽음에 대하여 묻습니다.” 공자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어찌 태어났는지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죽음을 알겠느냐?”대답을 유보하신 공자님은 우리들에게 죽음의 문제가 그리 쉽게 대답 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죽음의 불가사의를 문학적 측면에서 검토해 보려는 공부를, 6.25 사변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저는 계속해 왔습니다.
6.25로 말미암아 14세에 아버지와 오라비들을 납북 당하고, 이산의 상흔을 짊어지고 쓸쓸한 반세기를 살아 온 제가 공부할 수 있었던 영역은 한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학은 등록금이 비싸서 포기해야 했고, 법학이나 사회학은 저에게 금기의 영역이었습니다. 문학에서조차도 이데올로기나 사회정의를 언급하는 일은, 살아남아 있는 가족들을 위하여 접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죽음의 공포와 사별의 애통을 문학에 의지하여 극복하려는 주제에만 주력하였습니다. 하늘이 주신 생명의 가치를 확대하는 것이 곧 오래 사는 것이며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는 길이라는 종교 문학 연구로, 제 공부의 길이 기울어졌습니다.
그래서 문학은, 죽지 말고 살아남아 아버지와 어머니와 잃어버린 오라비들의 생명을 세상에 지속시켜주자고 나를 타이르는 인격적 동반자였습니다.
“기쁨과 행복이 연속될 때에만 하느님이 자비하시다고 생각하지 말게 하시고,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좌절하지 말라 하시며, 하느님이 내 손을 꼭 잡고 계신다고 찬미 감사드리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라는 시로, 쓰러지고 무너져 내릴 때마다 저를 지탱하도록 일으켜 세워 준 인도의 시성 타고르, 동생들 데리고 집단자살하자고 조를 때마다 타고르의 시를 들려주시며 살아야 한다고 타이르신 병약하나 강인하셨던 어머니,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 위하여,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자”는 생존의 의지를 키워 준 한국의 젊은 예수 윤동주,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는 희망을 지니도록 설득하는 한용운에게서 생존의 이유와 삶의 기력을 공급 받았습니다.
9.28 수복 이후에 저는 경인가도의 들판에서, 구더기 집이 되어있는 인민군의 시체들과 그리고 성조기에 싸여 구성진 레퀴엠 장엄 미사 장례곡을 들으며 승천하는 유엔군의 주검들을 보았습니다.
유엔군과 인민군의 주검을 비교하면서 인간의 종말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죽음의 공포 그리고 사별의 애통,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 이것이 제 문학 공부의 중심과제였습니다.
휴전 후에는 부평 백마정 근처에서 수많은 성매매 종사여성들을, 아버지를 잃은 전쟁고아들을, 까만 얼굴 노란머리 파란 눈을 가진 혼혈아들의 미혼모들을,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홀어미로 자녀를 양육하는 빈곤 여성가장들을 보았습니다.
숙명여대 교수가 되면서 봉급을 털어 여성복지에 헌신하게 된 동기 역시, 수많은 상흔을 지니고도 살아남은 사람이 마땅히 감사해야 할, 전쟁의 교훈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학교 수업이 정상화되기 전에 저는 잠시 병원에 취직하여 성매매여성들에게 페니실린 성병 예방 치료약을 주사하면서 간호보조사로 일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철이 들수록, 그 성매매여성들이 저를 위해 천 겹 정결의 보호 벽을 쌓아주어 제가 흑인장병들에게 성폭행 당하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님이 돌아가시면서 저에게 남기고 가신 유언 역시 여성복지의 일에 헌신하라는 것이어서, 가정폭력 혹은 성폭력 피해여성들 돌보는 시설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일을 시작하고서야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왔고, 서서히 그러나 단호하게, 죽음의 공포와 사별의 애통을 극복하는 제일 좋은 길이 결국은 사랑 실천에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남편이 성매매를 강요하여 도망 나온 아내, 자녀가 버린 병든 여인, 맥주병에 살이 찢긴 몸을 끌고 도망 나온 술집 여자 그리고 탈 성매매를 결심한 여성들과 함께 사는 일은, 제가 공부한 것을 실천하는 삶의 기쁨과 활력이 되었습니다.
“어른아이로부터 노년까지의 전 생애는 또 다른 탄생을 위한 성장이다. 또 다른 시발이, 또 다른 상황의 신분이 우리를 기다린다. 종말이라 생각하여 두려워한 그 날은 바로 영원 속에서의 탄생인 것이다. 잔치 자리에서 지정된 시간에 우아하게 물러나는 것이 손님된 사람의 의무이듯이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우리에게 만족을 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생명의 주인에게도 만족스러운 것이다.” 세네카의 말입니다.
이 말을 알아듣기까지 70년 생애를 공부한 것 같습니다. 인생은 수많은 난관의 터널들을 지나가면서 이어지는 것이지만, 터널의 저편에는 반드시 빛이 있다는 것을, 문학과 사회복지가 저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문학 속에서 삶의 목적과 생명 구원과 죽음문제에 천착하다 보니 '우리 시인들의 방황과 탐색' '우리 작가들의 번뇌와 해탈' 같은 문학 평론집을 내놓게 되었고, '죽음의식을 통해 본 소월과 만해' '죽음과 구원의 문학적 성찰' '한국문학에 나타난 죽음의식의 사적 연구' 같은 책도 쓰고, '죽는 이와 남는 이를 위하여' '죽음과 임종에 관한 의문과 해답' '죽기 전에 해야 할 열 가지 일'같은 책을 번역도 했습니다.
문학과 사회복지를 연계하는 공부를 통하여 저는 “자아진화를 통하여 민족 인류 공동 생명체 진화에 이바지함이 생명의 목적”이라는,가톨릭적 진화론에 친숙해졌습니다. 시주가 기도라는 스님 말씀도 가슴에 담았습니다.
“대동의 시대건설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대동의 시대가 오면 부모 없는 고아들이 온전하게 성장발전하고, 자식 없는 노인들이 편안한 노후를 살게 되고, 소외 여성들이 소속되는 바가 있게 된다”는 공자님 말씀 속에서 사회복지 실천의 영역을 공부하였고 “배고픈 사람에게 밥 주고 추운 사람에게 옷 주고 교도소에 있는 사람을 도운 것이 바로 하느님을 도운 것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복지 실천론을 배웠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장수하고 싶어 하는데, 인간이 천년을 살 수는 없고, 결국 인간이 장수하는 길은 세상에서 남기고 가는 사랑의 추억을 통하여, 그 추억을 기억해 주는 사람들 안에서 장수하는 것이라고, 서양의 어떤 현자는 말했습니다.
최근에 교수직을 정년퇴임하면서 그 퇴직금과 연금을 일시불로 받아 집을 짓고 복지 시설을 확장하였습니다. 같은 시기에 때마침 우리나라 국회에서 성매매방지법이 통과되어 마음 편히 탈 성매매여성들을 보호하게 되었는데, 또 시기적절하게도 지난 9월에는 로마의 베네딕도 16세 교황님께서, 성매매여성들을 현대판 노예제도의 노예적 희생자로, 그리고 성 구매 남성을 성욕의 악마에 억압되어있는 영적 질환자로 규명하고, 그들을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키는 일에 모든 성직자와 수도자와 인류 모두가 노력해 달라고 호소하시었으니, 문학과 복지학을 연계하여 공부하고 실천한 일은 좋은 공부였다 생각되어, 인생의 노년에 참 평화와 기쁨을 누립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이 유행합니다. 가진 자의 의무라는 뜻입니다. 공부한 자의 의무입니다. 피해 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이 피해당하며 산 사람에게 빚을 갚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누군가 고통을 내 대신 짊어지어 내가 그 고통에서 면제 받았으니, 내 대신 고통을 감수한 사람들에게 빚을 갚는 것을 삶의 원리로 알고 살자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그렇게 살도록 문학과 사회복지학이 삶의 지혜를 주었고 또 끊임없이 주고 있음을, 진심으로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며칠 안으로 시간을 내어 부모님 묘소에 다녀오려 합니다. 아버님 얼굴을 종이에 그려 어머님 곁에 놓아드리고, 부모님 합장묘라 생각하며 만들어 드린, 어머님만 묻힌 산소입니다.
구원의 문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라고, 타고르의 기도문으로 저를 살려내신 어머님과,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시던 복지 이념의 지도자이셨던 아버님이 몹시 그리운 가을밤입니다.
제 생명을 통하여 제 아버님과 어머님이 저를 통해서 조금이라도 더 장수하시기를 염원하는 작은 효심으로 이 글을 씁니다. 아버님, 어머님, 뵈옵는 날까지 평안하소서.
■ 이인복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이인복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미혼모와 가정폭력피해여성, 성매매탈출여성을 돕는 사회복지법인 나자렛성가회 이사장이다. 그는 남편인 심재기 서울대 명예교수와 함께 교수로 받는 수입을 불우여성을 위해 써오던 중 1989년에 사재를 털어 나자렛성가회를 만들었다.
1937년 인천에서 유복한 사업가의 2남 6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한국전쟁 중 아버지와 오빠, 남동생이 납북되었으나 '월북자' 가족이라는 오해를 사서 모든 재산을 잃었다.
이로 인해 다섯 여동생을 데리고 가톨릭계 보육원에서 성장했으며 고학으로 숙명여대를 졸업하였다. 이 때 어려운 형편에도 기지촌 여성들을 돕는 어머니를 본 것이 평생 불우 여성을 돕는 계기가 됐다.
영훈고등학교 교사와 숙명여대 강사를 거쳐 72~76년 말레이시아 페낭대 조교수, 77년부터 2002년까지 숙명여대 교수를 지냈다. 복지전문가가 되기 위해 남편과 더불어 늦공부를 시작, 현도사회복지대 사회복지학과를 2003년에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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