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귀국할 당시만 해도 ‘한국 증권업계는 별로 달라진 게 없네’하는 인상을 받았는데, 지금은 다릅니다.” 10년 간의 해외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지난 4월 우리투자증권 기관ㆍ리서치본부장으로 부임한 박천웅씨는 귀국 후 2년 사이에 국내 증권업계가 무서운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모건스탠리 서울지점 리서치헤드를 지낸 그는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은 물론 금융업계도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거쳤지만 유독 증권사들은 이를 겪지않은 채 위탁매매 중심으로 일관했던 게 2년 전까지의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다.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1997년부터 2003년까지 은행은 33개에서 19개로 줄었고, 종금사는 30개에서 2개로, 저축은행은 231개에서 114개로 줄었지만 증권사는 36개에서 44개로 오히려 늘었다.
그 많은 증권사들이 고객의 주문을 받아 주식을 사고 파는 위탁매매 부문만 놓고 겨루다 보니 업계 전체가 경쟁이 격화하는 이른바 ‘레드오션’이 돼 버렸다. 위탁매매 영업조차 수수료가 극히 낮은 온라인 매매 위주로 전환되면서 수익성은 더욱 떨어졌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라 했던가. 거래대금 급감으로 적자에 허덕이던 지난해, 증권업계에는 제살깎아먹기식 수수료 인하경쟁을 지양하고 각자 특장을 갖춘 업무영역을 개발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증권업계의 ‘블루오션’(경쟁없는 신시장) 개척은 일찌감치 위탁매매에서 자산관리업으로 주력사업을 바꾼 삼성증권이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올들어 프라이빗뱅킹(PB) 서비스를 모든 지점으로 확대해 부유층 고객 확보에 힘을 기울였다.
때마침 개인과 가계의 재테크 설계에 변화가 일면서 시중자금이 투자상품으로 밀려들어와 예탁잔액이 1억원 이상인 고객자산이 6월말 현재 20조원으로 1년 전보다 24%나 증가했다. 전체 순익 중 위탁매매 수수료 비중도 49.4%로 경쟁사들보다 현저히 낮아졌다.
우리투자증권은 골드만삭스와 메릴린치 같은 외국계 투자은행(IB)을 모델로 삼아 기업금융과 자산관리업을 집중 육성하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투자은행 중 최강의 기업금융 실적을 자랑하고, 메릴린치는 미국 1위의 위탁매매 점유율과 혁신적 상품 개발능력을 바탕으로 자산관리 영업에 주력하는 회사다.
이미 국내 증권사 중 IB부문 1위를 지켜 온 우리투자증권은 최근 하이닉스의 해외 주식예탁증서(DR)를 발행하는 공동주간사와 대우일렉 매각 자문사로 선정돼 이 부문에서 압도적 지위를 누려온 외국계 투자은행과도 대등하게 자웅을 겨루고 있다. 이에 따라 올해 IB부문 수수료 이익만 상반기에 200억원을 넘어섰다.
국내 시장에 안주하지 않고, 해외시장이라는 또 다른 블루오션 공략에 적극 나서는 증권사들의 프런티어쉽도 높이 평가할 만 하다.
한국투자증권과 현대증권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한국투자증권은 지난달 국내 처음으로 베트남 증권사와 업무제휴를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데 이어 이 달에는 중국의 대규모 부동산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등 신시장 개척에 나서고 있다.
현대증권은 국내 최초로 중국의 부실채권을 인수해 660만달러어치의 자산유동화증권(ABS)을 발행하는 데 성공했으며, 뉴욕 현지법인이 최근 1,200만달러를 증자하는 등 해외 영업에 밝은 전망을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의 증권사들이 위탁매매 이외의 특화 부문을 개발하겠다고 나선 가운데 대우증권은 오히려 위탁매매영업 강화에 나서 주목을 받고 있다. 이 회사의 전통적 강점인 위탁매매 부문을 더 튼튼히 한 후에 이를 바탕으로 자산관리 부문에도 박차를 가하겠다는 것이다.
이 전략은 올해 증시 활황과 맞물려 기막히게 적중, 4~9월(증권사 회계연도상 상반기) 증권사 중 가장 많은 순익을 기록했고 주가도 지난해 말 3,000원대에서 최근 1만3,000원대로 급등했다.
최근 정부는 국내 증권사들이 외국계 투자은행과 같은 ‘종합금융투자회사’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증권사를 묶고 있는 각종 규제를 풀겠다고 밝혔다. 간판만 다를 뿐 영업내용은 대동소이했던 과거 천편일률적 증권사에서 크게 변신해 저마다 특화된 차별적 경쟁력을 쌓아가고 있는 증권업계로서는 이에 대환영이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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