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독선적 외교행태에 대한 불신이 아시아뿐만 아니라 중남미에서도 확산되고 있다. 이번엔 살인과 공금횡령 등 21건의 범죄 혐의로 국제수배 된 알베르토 후지모리(67) 전 페루 대통령에 대한 ‘감싸기 외교’ 때문이다.
다비드 와이즈만 페루 부통령은 11일 일본과의 외교 단절을 촉구했다. 그는 페루 일간 에스페레소를 통해 지난 주 칠레를 기습 방문한 직후 사법당국에 구속된 후지모리 전 대통령에 대한 일본측의 대응을 거듭 비난하며 이같이 요구했다. 페루 정부는 후지모리 구속 직후 주일 페루대사의 소환을 발표하는 등 강한 불쾌감을 나타냈었다.
일본 정부는 일본에서 사실상 망명 생활을 해왔던 후지모리에 대한 페루의 신병 인도 요구를 ‘일본 국적’임을 내세워 일축해 왔다. 일본은 또 인터폴에 의해 체포영장이 발부된 국제범죄 용의자가 출국하는데도 당사국인 페루 등에 통보하지 않았고, 후지모리가 구속된 후에도 일본 외교관들이 접촉하는 등 페루 정부의 심기를 건드렸다.
페루 뿐만이 아니다. 리카르도 라고스 칠레 대통령은 9일 후지모리 출국에 대한 일본 정부의 ‘통보 생략’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후지모리씨가 페루 여권으로 칠레에 입국했고, 입국카드에도 페루국적으로 기입했다”며 “그를 일본인이라고 주장해 온 일본정부는 무엇인가 설명해야 하는 입장이 됐다”고 지적했다. 뒤늦게 후지모리의 경유사실을 확인한 멕시코 정부도 일본의 ‘통보 생략’과 관련해 일본측에 외교적 해명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 전문가들은 중남미 국가들의 불신감이 일본과의 급격한 외교 갈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전망하고 있다. 일본과의 경제 협력이 어느 때보다도 긴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지모리 문제는 상대방을 무시하는 듯한 일본 외교행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이 지역에 확산시켰다고 지적했다.
일본정부는 이 같은 상황을 곤혹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이중국적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일본이 페루 대통령까지 지냈던 후지모리를 ‘일본 국적’이라는 이유로 보호한 것은 국제사회에서 용납되기 어려운 행태라는 것을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소 다로(麻生太郞) 일본 외무성 장관은 페루의 대사 소환 조치에 대해 11일 “(후지모리 문제와) 직접 관계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하는 등 종래의 일본식 외교 화법을 계속함으로써 불신을 증폭시키고 있다.
도쿄=김철훈 특파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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