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영일만의 기적’으로 불리는 270만평의 광활한 포항제철소를 찾았지만 유일하게 내부를 볼 수 없는 곳이 있었다. 세계 철강역사를 다시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연산 70만톤 규모의 파이넥스(Finex) 데모 설비였다.
사전에 취재를 약속해놓았고 포스코 본사 직원까지 동행했지만 외부인은 말할 것도 없고 포스코 내부 직원도 극소수 임직원만 제외하곤 아예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성역’이었다.
파이넥스의 원리나 시험 생산 과정, 기술개발 과정 등은 ‘특1급 비밀’로 통한다. 혹시라도 산업 스파이가 침투해 이 같은 기술이 외국 경쟁업체로 유출될 가능성을 철저히 차단하기 위한 조치다.
그도 그럴 것이 포스코가 지난해 초 파이넥스를 처음 공개했을 때 세계 철강인들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 철강업계는 철광석과 유연탄을 정제, 덩어리로 만든 뒤 쇳물을 만드는 고전적인 고로(高爐ㆍ용광로) 방식을 벗어난 다른 공법의 현실화를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세계 철강 메이저들은 고로를 대체할 수 있는 신공법 개발에 매달려 왔지만 기술 부족과 경제성 문제 등으로 번번이 실패했다. 파이넥스의 핵심은 ‘용광로 없이 철을 생산한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고로 방식은 석탄을 구워 덩어리로 만드는 코크스 공정과 철광석을 쪄서 덩어리로 만드는 소결(燒結) 공정이 반드시 필요하며 이때 황산화물(SOx)과 질소산화물(NOx) 등 환경오염 물질이 대거 배출되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파이넥스는 이 과정이 생략돼 철광석과 석탄을 원료 그대로 넣기 때문에 오염물질 발생과 비용이 획기적으로 줄어드는 경제적이면서도 친환경적인 최첨단 공법이다.
기존 고로에 비해 황산화물과 질소산화물의 배출량이 각각 92%, 96%씩 줄어든다. 고로마다 수백억원씩 들어가는 환경오염 방지시설을 따로 지을 필요도 없어진다.
비용 측면에서도 고로에 비해 생산 원가를 17% 가량 줄일 수 있다. 파이넥스는 전세계 철광석 생산량의 80%가 넘는 분철광석을 원료로 사용한다.
이 분철광석은 덩어리 형태의 괴철 광석보다 가격이 20% 정도 저렴한, 지름 8㎜ 이하 가루 형태여서 파이넥스 공법 사용 땐 원료 값을 대폭 줄일 수 있다. 코크스와 소결공정이 생략된 만큼 이곳에서도 20% 정도의 비용 절감 효과를 본다. 설비 투자비도 대폭 줄어든다.
현재 포항제철소내에 건설중인 150만톤 규모의 파이넥스를 1개 짓는데 1조3,000억원이 들어가기 때문에 동일 규모의 고로 건설비 1조4,000억원에 비해 1기당 1,000억원씩 줄일 수 있게 된다.
포스코가 본격적으로 파이넥스 공법 연구 개발에 착수한 것은 1992년. 박태준 명예회장이 “앞으로 10년 후, 21세기가 되면 환경문제로 고로 방식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며 신공법 개발을 지시한데 따른 것이다. 이에 따라 포스코는 연구ㆍ설비ㆍ건설인력 등 10여명으로 태스크포스를 만들었다.
초기부터 이 팀에 참여했던 이후근 파이넥스연구개발추진반 조업기술 실장은 “처음에는 코크스와 소결 공정을 없애 보자는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파이넥스로 가기 위한 중간 단계로 파이넥스와 공법이 유사한 코렉스 공법을 1995년 시험적으로 도입해 가동하기 시작했다.
코렉스 공법은 파이넥스와 유사하게 코크스와 소결 공정을 없애고 철광석과 무연탄을 미세가루로 부숴 바로 코렉스로(爐)에서 태우는 방식이다.
용광로 안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쇳물을 흘리는 과정에서 환원(철에 붙어 있는 녹을 제거하는 공정)과 용융(원광석에 붙어 있는 돌가루 등 불순물을 제거하는 공정) 과정을 유도, 쇳물을 만든다.
하지만 세계 철광석시장의 80%를 차지하는 분철 광석을 사용하지 않고 괴철 광석을 사용, 원료확보가 쉽지 않은 단점을 가지고 있다.
포스코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수 차례 실패를 거듭한 끝에 유동로를 만들어 일산화탄소와 수소 등 가스를 넣어 환원 과정을 거치고 용융로를 통해 고온의 분광석을 넣어 용융 과정을 통해 고로없이 철을 생산하는 파이넥스 공법을 개발해냈다.
96년 하루 15톤을 생산할 수 있는 파이넥스 설비 시험 공장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99년 시험 공장의 생산량을 10배로 늘렸으며 2003년 5월 드디어 연간 60만톤을 생산하는 데모 설비를 준공, 가동했다.
이어 지난해 8월 1조3,180억원을 들여 연산 150만톤의 상용화 설비를 착공했다. 내년 말이면 이 시설이 완공돼 2007년초부터 파이넥스를 통해 세계 최초로 쇳물이 생산될 예정이다.
92년부터 4,200억원에 달하는 연구ㆍ개발(R&D) 비용을 들여 포스코의 신화창조가 드디어 세상을 빛을 발하는 순간이 되는 것이다. 파이넥스는 산업자원부가 올해 초 발표한 ‘대한민국 10대 신기술’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대표적인 ‘굴뚝산업’으로 여겨졌던 포스코가 R&D를 통해 첨단 기술업체로 부상할 수 있는 또 다른 기술은 스??캐스팅(Strip Casting) 공정.
섭씨 1,500도 이상의 쇳물을 0.2초만에 롤 사이에서 응고시켜 두께 2~6㎜의 핫코일을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지난해 980억원을 들여 연산 60만톤의 ‘포스크립 데모플랜트’ 공장을 착공했으며 2006년 6월 완공된다.
압연(고온의 쇳물을 2개의 롤 사이로 통과시켜 여러가지 형태로 만드는 것) 과정을 생략할 수 있어 환경오염을 대폭 줄일 수 있고, 제조공정 및 납기를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다. 이 같은 2개의 기술만 상용화해도 포스코는 세계 최고 기술을 자랑하는 철강 메이저로 우뚝 서게 된다.
포항=황양준 기자 naigero@hk.co.kr
■ 이후근 파이넥스 연구개발 실장
“미래 성공에 대한 꿈이 없었으면 이미 좌절하고 말았을 겁니다.”
포스코가 92년 ‘꿈의 제철 기술’로 가정하고 파이넥스 공법 개발에 나섰을 때 설비개발팀 5명 가운데 한명으로 참여해 현재 14년째 이곳에 매달려 있는 이후근(46) 파이넥스연구개발추진 조업기술 실장은 “지금도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수 만번의 좌절을 겪으면서도 실험을 계속해서 파이넥스를 개발해냈지만 앞으로도 극복해야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연산 70만톤 규모의 파이넥스 데모 설비를 가동하고 있지만, 내년 말 완공 목표로 건설중인 연산 150만톤의 상용화 설비가 남아있다.
그는 “처음에 2명이 타는 비행기를 만드는데 성공했다가 점차 수백명이 타는 대형 여객기를 만들려면 그 만큼 엔진도 키워야 하는데 파이넥스도 똑 같은 원리”라고 말했다.
앞으로 파이넥스를 대형화할 때 시행착오가 분명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사실 이 실장은 파이넥스 공법 개발 과정에서 수 차례 이 같은 경험을 했다.
파이넥스 기술을 완료하고 2003년 6월 임시 라인을 가동하던 중 환원된 철을 살짝 눌러 융용로로 보내는 성형철(HCIㆍHOT Compacted Iron)이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프랑스의 한 회사와 HCI를 개발했지만 설치한지 1주일도 못돼 고열을 견디지 못하고 깨져버리는 것이었다. 결국 이에 대한 세계적 독점을 갖고 있던 독일의 한 회사로부터 HCI를 들여왔다.
하지만 이것은 용량이 시간당 30톤에 불과해 포스코가 원했던 시간당 60톤에 맞지 않았다. 포스코내 모든 기계와 설비 전문가를 불러모아 3개월의 연구 끝에 마침내 시간당 60톤의 HCI를 만들어냈다.
이 실장은 “사실 파이넥스의 핵심은 철에서 산소(녹)를 떼어 내는 환원과정을 거치는 유동로와 산화된 철에 붙어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는 용융로인데 의외로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HCI가 가장 힘들게 했다”고 회고했다.
“세계 최초 기술이란 것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것 하나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하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을 극복하고 성공을 했을 때 오는 기쁨은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겁니다.”
황양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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