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 충성 대중을 위해 농촌을 위해) 이 한 목숨이 농촌에 큰 힘이 되기를 바라면서.”
30대 농민이 쌀 시장 개방과 농촌 교육문제 등 갈수록 어려워지는 현실을 토로하고 정부의 농정개혁을 촉구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을 이장이며 농협 이사로, 늦깎이 대학생으로 대학총학생회장을 맡으며, 결혼도 포기하고 홀로 노부모를 모시던 ‘농촌운동가 농삿꾼’의 죽음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12일 오전 10시15분께 전남 담양군 남면 인암리 마을회관에서 농약을 마시고 숨진 채 발견돼 13일 한 줌의 재로 변한 정용품(38)씨. 농업인의 날인 11일 저녁 마을회관에 혼자 남아 농촌문제를 고민하던 그는 달력 뒷면에 ()와 * 등을 섞어가며 자세하고도 뚜렷한 유서(사진)를 남겼다.
“정부는 농촌 정책(쌀 문제, 교육문제)을 현실에 맞게 세워 농촌이 잘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사회가 투명해 지도록 위에 계신 분들 먼저 청렴해야 한다. 정말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야 한다.”
5남2녀 가운데 장남인 정씨는 1986년 방송통신고 졸업과 함께 광주의 한 호텔 주방장으로 취직했다. 바쁜 직장생활 중에도 방송통신대 가정학과를 다니며 ‘한식요리 명장’의 꿈을 키워가던 그는 94년 호텔이 부도가 나자 이듬해 낙향해 노부모를 모시고 농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농촌의 모습은 낯설기만 했다. 3년 후. 제법 손마디가 굵어지고 구릿빛 얼굴의 농사꾼 티가 날 즈음, 그는 비로소 농촌 문제에 눈을 떴다. 흙에 묻혀 뼈가 빠지게 일을 해도 일한 만큼의 보상도 받지 못하는 현실이 서글펐다. 벼를 심고 밭을 일구고, 과수원, 농원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지만 쌓이는 것은 빚더미 뿐이었다.
“이게 아닌데…, 뭔가 잘못돼 가고 있는 게 분명해.” 그는 농민을 위한 ‘농업경영’을 해보겠다며 다시 대학(방송통신대 행정학과)을 다니며 발버둥을 쳤지만 현실은 여전히 버거웠다. 그가 2003년 대학 졸업 후 본격적인 농민운동에 뛰어든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는 “먼저 농민들의 의식구조가 바뀌어야 한다”며 한국농업경연인연합회 등 농민단체 활동은 물론 농협 이사, 마을 이장까지 맡았다. ‘농민들과 함께 일하며 농민들을 지도하겠다’는 신념을 실천해 나갔다.
마을 선배 정희용(43)씨는 “어려운 농촌을 바꿔보겠다며 결혼도 하지 않고 노부모를 모시고 열심히 사는 그의 모습에 모두들 칭찬이 자자했다”며 “평소 잘못된 농업정책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그는 특히 최근들어 제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자기 몫도 챙기지 못하는 농민들의 현실을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말했다.
힘없는 농민들과 암울한 농촌현실은 그를 또 다시 대학으로 이끌었다. 지난해 ‘떠나는 농촌’에서 ‘돌아오는 농촌’을 만들어 보겠다며 2년제인 남도대학(관광학과)에 입학했다. 올해에는 대학생들이 농촌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총학생회장에 출마해 당선됐다. 정씨는 “우리가 손해를 보더라도 농촌을 살리는 길이라면 우리 마을에 농업과 관광을 하나로 묶은 관광체험 테마단지를 만들어 보자”며 선배 이모(43)씨와 함께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다.
이씨는 “소주 한 잔 걸칠 때마다 농촌문제에 대해 고민을 털어놓고 열변을 토하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아른거린다”며 “정부가 농민의 입장에서 제대로 된 농업정책을 세웠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담양=안경호 기자 k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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