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의 영토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복판에 꽂아 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성스러운 깃발
태초부터 나의 영토는
좁은 길이었다 해도
고독의 진주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
애처로이 쳐다보는
인정의 고움도
나는 싫어
바람이 스쳐가며
노래를 하면
푸른 하늘에게
피리를 불었지
태양에 쫓기어
활활 타다 남은 저녁 노을에
저렇게 긴 강이 흐른다
노오란 내 가슴이
하얗게 여위기 전
그이는 오실까
당신의 맑은 눈물
내 땅에 떨어지면
바람에 날려 보낼
기쁨의 꽃씨
흐려오는
세월의 눈시울에
원색의 아픔을 씹는
내 조용한 숨소리
보고싶은 얼굴이여
꽃답던 스무 살 즈음의 예비수녀 시절, 이해인 수녀가 부산 성베네딕도수녀원 베란다 틈새에 핀 민들레 한 떨기를 보고 쓴 시가 ‘민들레의 영토’다. “죽은 돌 틈 그 초라한 영토에 앉아서도 기쁨의 꽃씨를 세상에 퍼뜨리는 민들레처럼 기도하며 살자는 마음”을 담은 그 시는 10년쯤 뒤인 1976년 2월, 박두진 시인 등의 눈에 들어 시집으로 묶인다. 초판 1,500부의 소박한 그 책이, 올해로 30년을 이어오며 50쇄라는 기록적인 발행부수와 부수 이상의 사랑을 받고 있는 국민 시집 ‘민들레의 영토’다.
시집이 나오던 그 해 그 달 그 수녀원에서 종신서원을 했던 이제 갓 환갑의 수녀시인이 생애 첫 초청장을 만들었다. 시를 사랑하고 시인을 아껴준 이들, 시의 메시지를 귀히 여겨준 이들과 함께 하는 감사의 자리. 초청장 말미에 그는 “언론 공개는 않을 참이니 협조 바란다”는 문구를 달았다. 그 소식이 민들레 홀씨처럼 조용히 퍼져나간 게다.
소설가 박완서씨, 문학평론가 구중서씨, 서울대 음대 학장 신수정씨와 동생인 서양화가 신수희씨, 원주밥상공동체의 허기복 목사가 초대인사로 참석해 말과 박수와 노래로 이 조촐한 잔치의 흥을 돋우고 화가 김점선씨도 기차표를 끊었다고 전갈을 보내왔다고 한다. 후배수녀들이 이해인 수녀의 삶과 문학을 디지털 영상편지로 만들어 선뵈고, 어린 예비수녀들이 시인의 시 노래와 율동으로 ‘재롱잔치’를 벌일 모양이다. 시집이 나오던 해에 태어난 수녀와 그 해에 수녀가 된 후배들이 꽃다발과 선물을 증정하는 자리도 마련됐다. 장애인단체 ‘사랑의 고리’ 회원들, 인터넷 카페 식구들, 시인의 40~50년 지기 등 모두 80여 명이 초대됐다고 한다.
예쁜 스티커며 향기 나는 우표를 붙여 편지를 보내오는 시인을 ‘요술공주 이모님’이라고 부른다는 신창원씨는 옥중에서 축하 편지를 보냈고, 서강대 장영희 교수, ‘야생초 편지’의 저자 황대권씨도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움과 감사의 메시지를 전해왔다. 김용택 시인은 “수녀님께서 날려주신 민들레 씨들이 세상으로 날아가 사랑의 씨가 되어 우리들의 기도가 되고…”로 이어지는 글을, 정호승 시인은 “꽃들의 영토로 알았던 ‘민들레의 영토’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토인줄 이제야 알겠다”는 글을 전했다.
그 30년 민들레의 시간이, 스타 시인으로서의 삶이, 그래서 교과서와 관련서 저작권만 10여종을 지니게 된 그의 글의 나날들이 늘 곱고 평탄하지만은 않았으리라. “부정 출판물 시비며 이런 저런 거짓말 등 시련도 있었지요. 지금 이 감사의 마음도 중간에 주저앉았더라면 누리지 못했을 축복입니다.”
이제 그는 쓰는 시간보다 쓴 것들을 돌아보고 익히는 시간을 갖겠다고 말했다. 종이가 아닌 삶에 시를 쓰겠다는, 삶 자체를 시로 만들겠다는 다짐이다. 이번에 낸 영역시선집 ‘눈꽃아가’(열림원) 서문에도 그는 “고독과 침묵의 수도생활을 통해서 나 자신도 조금씩 ‘버릴 것은 버리고’ 한 편의 시가 되어가는 느낌을 받는다”고 적었다. 고운 말 목록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뚜껑 열리는’ 일 있어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어도 그냥 ‘화 나서’ ‘못 견디겠다’고 말하자고 속삭이는 그는, 리모컨으로 자동차 문을 여는 일도, 신용카드가 돈을 대신하는 일도, 놀랍고 신기해서 그 일상의 새로움에 늘 감탄하느라 지루한 줄 모른다는 그는 여전히 젊고 꽃답다.
30년 전, 베란다 귀퉁이에 폈던 고독한 그 꽃이, 시의 다짐처럼, 그리 많은 ‘기쁨의 꽃씨’ 뿜어 이제 이렇게 눈부신 꽃무리 이뤘으니 이번 행사에 ‘그이’ 오셔서 ‘당신의 맑은 눈물’ 떨궈줄 것은 자명해보인다. 바람 일면 바람이, 비 오면 빗방울이, 노을지면 그 빛이 ‘당신의 눈물’ 아니겠는가.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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