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중ㆍ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방폐장) 입지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지난 19년간 표류해온 국가적 난제를 풀었다며 이를 공공갈등 해결의 모범사례로 확산시키려는 정부의 해석과는 달리 분위기가 썩 좋지만은 않은 것 같다.
무엇보다도 주민투표 찬성률을 입지 선정 기준으로 내세워 과열 경쟁을 조장했고, 그 결과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고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날카롭다. 탈락한 지자체들이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는 가운데, 언론은 대체로 결과에 대한 승복을 촉구하는 논조이다.
진보적 성향의 학자들은 민주주의를 돈으로 산 것에 불과하고 주민투표가 오히려 풀뿌리 민주주의를 크게 후퇴시켰다고 혹평한다. 정부는 안도하면서도 억울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이지만, 지켜보는 국민의 심정은 그저 착잡할 뿐이다.
찬성률에 의한 결정이나 관권 개입, 투표 부정도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주민투표를 통해 표출된 지역 주민들의 의사를 단순히 관권 부정선거의 결과로 평가절하하는 것도 위험한 발상이다.
●방폐장 주민투표서 목격
그렇게 평가절하만 하면 관권 부정선거를 감안하더라도 투표율 70.8%에, 89.5%의 찬성률을 보인 경주 시민들의 뜻은 뭐가 되는가. 또 찬성했지만 경쟁에 탈락하고 분통을 터뜨린 다른 지역 주민들의 의사를 모두 왜곡된 것으로 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민주주의를 돈으로 샀다는 비난도 생각해 볼 점이 없지 않다. 사실 매수 방식이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확립된 정설이다.
매수 방식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굴업도부터 부안까지 정부가 줄곧 지역주민의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구사했던 수법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특별지원금 3,000억 원과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이전, 양성자 가속기 건설 등 인센티브가 파격적이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같은 매수 방식이 종전에는 왜 실패했을까. 단지 금전적 인센티브가 적었거나 불확실해서였을까. 만일 방폐장이 지역주민의 건강이나 생명에 심각한 손상을 끼칠 위험이 있다고 우려했다면 그 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었을까. 의문은 꼬리를 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방폐장이 처리하는 폐기물이 중ㆍ저준위 폐기물로 제한됨으로써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크게 완화된 반면 그 입지 수용 대가가 파격적 수준으로 법에 명시되는 등 인센티브 구조가 확연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이처럼 이례적인 보상 유인이 없이는 한 치도 양보하거나 손해를 감수하지 않겠다는 것이 오늘 우리의 인심이고 시민의식의 현실이다. 그 현실이야말로 그동안의 갈등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경향적 특징이었다. 개발에 따른 편익과 부담의 배분에 대한 불만과 정부에 대한 불신이 악착같은 저항으로 이어지곤 했다.
게임의 룰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문제의 환경적 측면이 부차적으로 다루어진 점, 일부 환경단체가 방폐장의 환경오염 위험을 과장했던 점은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소수의 전문가만이 방폐장 안전성 확보의 중요성을 부각시켰을 뿐, 정작 주민투표에 임하는 주민들이 의사결정의 기초로 삼아야 했던 안전성 논의는 소홀히 다루어졌고 선정된 경주시의 몫으로 남겨 졌다.
●민주적 의사결정방식 선례
과열 경매였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 공공갈등의 해결과 관련, 우리가 얻은 한 가지 교훈은 위험시설의 입지 결정을 주민투표에 맡김으로써 결과적으로 반대 단체나 주민들이 공동체 게임의 틀을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환경 운동가들에게는 역설적 교훈이 될지 모르지만, 어차피 공동체의 어디에선가 감당해야 할 공동의 부담이라면 공정하고 합리적인 규칙에 따라 주민들을 설득하고 그 의사결정의 결과에 승복하는 것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신앙 문제가 아닌 한 환경운동에서도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요구가 아닌가 한다.
홍준형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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