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은 글씨가 인품을 반영한다고 했다. 꼭 이황이 아니더라도 우리 조상들은 글씨에 사람의 심성이 녹아 있고 때로는 자기 과시의 욕망까지 숨어 있다고 믿었다.
그 때문인지 명필은 명문장가와 더불어 지식인의 표상으로 인정 받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들이 종이에 쓴 글씨는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대신 비석은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탁본 등을 통해 그들의 솜씨를 감상할 수 있다.
선조들의 빼어난 글씨체를 볼 수 있는 두개의 탁본전이 열린다. 성균관대 박물관이 10일 개막한 ‘고려조 금석문 탁본전-돌에 새겨진 선사들의 삶’ 기획전과, 한신대 박물관이 11일 개막하는 ‘한석봉의 서예’전이 그것이다.
내년 1월31일까지 열리는 ‘고려조 금석문 탁본전-돌에 새겨진 선사들의 삶’에는 남한에 현존하는 주요 금석문 탁본 49종 70점이 공개된다. 이 가운데는 명필의 작품도 있고 선사들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도 있다.
안동 태자사의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는 신이 내린 솜씨를 지녔다 해서 신필로 불렸던 신라말 김생의 글씨를 집자해 954년 만든 비석이며 원주 흥법사의 ‘진공대사비’는 고려 태조 왕건이 비문을 짓고 당 태종의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940년 건립됐다.
고려 탑비의 백미인 원주 법천사의 ‘지광국사 현묘탑비’는 1085년 고려 선종의 왕명에 의해 세워졌는데 구양순체의 대가 안민후가 글을 썼다. 또 청도 운문사의 ‘원응국사비’는 당대의 학자 윤언이가 글을 짓고 명필 탄연이 글씨를 썼다. 탄연은 이 비문에서 힘이 넘치는 구양순체와, 깔끔한 왕희지체를 결합해 힘과 단아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서체를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는 순천 송광사에 있는 ‘보조국사탑비’, 군위 인각사의 ‘보각국존정조비’의 탁본도 소개된다. 지눌의 행적을 기록한 보조국사탑비는 고려 희종 때인 1210년 건립했으나 탁본만 전해지던 것을 조선 숙종(1678년)때 다시 세운 것이며 1295년 만들어진 보각국존정조비는 중국에서 가져온 왕희지 작품의 탁본에서 글씨를 발췌했다.
‘한석봉의 서예’전은 조선의 명필 한석봉의 서거 400주기를 기념해 마련한 행사다. 16일까지 경기 문화의 전당에서 열리는데 한석봉의 친필 비석과 그의 글씨를 모아 새긴 석봉체 집자비 글씨 등 50여점이 선보인다. 한석봉은 조선 선조 대의 서예가로 한국적 미감을 바탕으로 석봉체를 완성, 국가 문서의 표준서체가 되는 독창적인 서풍을 확립했다.
‘허엽 신도비’는 한석봉이 39세 때 쓴 작품으로 필획이 장엄한 그의 중년기 대표작이다. 허엽은 허균의 부친으로 홍문관 부제학,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고 동인의 영수로 활약했다.
허균 집안과 한석봉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비석이다. ‘행주대첩비’는 권율 장군이 왜병을 격퇴한 행주산성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1602년 세웠다.당대의 문장가 최립이 비문을 짓고 한석봉이 글씨를 썼는데 훗날 심하게 마모돼 1845년 더 큰 규모로 비를 만들면서 종전 비문을 그래도 옮겼다. 한석봉 시대와 그 이후 글씨체를 비교할 수 있는 귀한 작품이다.
또 ‘김유 상석 각자’는 청풍 김씨인 김유 묘역의 상석에 한석봉의 큰 글씨를 모아 상석 전면과 좌우 측면에 새긴 것으로 영조 때인 1753년 만들었다. 한석봉 사후 150년이 된 영조시대에도 그의 글씨가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한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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