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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조류 인플루엔자, 또는 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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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조류 인플루엔자, 또는 AI

입력
2005.1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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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부터 한국일보를 비롯한 대부분 신문에 같은 취지의 안내기사가 실렸다. 그 동안 써온 ‘조류독감’을 ‘조류 인플루엔자(avian influenza)’로 바꿔 표기한다는 내용이었다.

조류독감은 새들만 걸리는 질병인데도, 독감이란 표현이 사람도 감염된다는 ‘오해’ (사실은 오해만은 아니다)를 줄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큰 피해를 입고 있는 양계농가, 닭 가공업체 등의 호소를 농림부가 받아들여 용어 수정을 요청한데 따른 것이다.

이후 신문에선 ‘조류독감’이란 용어가 사라졌다. 기사 머리에 ‘조류 인플루엔자’를 쓴 뒤에는 영어약어인 ‘AI’로만 표기하고 있다. 이 때문인지, “걱정할 것 없다”는 대대적 홍보 때문인지 닭 소비 폭락세는 현저히 둔화했다. 결과가 좋아 다행이지만 그래도 이건 어떤 면에서는 ‘용어의 기만’이다.

인플루엔자를 굳이 원어로 쓰는 것은 이를 독감으로 해석 못하는 ‘무지한’ 이들만이라도 슬쩍 속여보겠다는 것처럼 보여 느낌이 썩 좋지 않다. ‘오해’ 때문에 그랬다면 ‘돼지콜레라’ 따위는 또 어쩔 것인가.

더욱이 생경한 약어 ‘AI’는 우리 국민에게는 의미 연상을 아예 차단하는 효과를 갖는다. ‘bird’ 만큼은 아니어도, 조류를 뜻하는 형용사 ‘avian’은 일반적 단어다. 실제로 영어권 매체들은 ‘avian influenza’와 ‘bird-flue’ 등을 구분 없이 혼용하고 있다. 우리에 비하면 그 쪽 사람들은 실체와 용어의 간극이 없는,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 받고 있는 셈이다.

이런 식의 인위적 왜곡으로, 즉각적으로 알 수 있던 원래의 의미가 가려지거나 훼손된 용어들은 많다. 다소 뜬금없는 예이긴 하지만 ‘동포(同胞)’도 그렇다. 지금은 모든 재외국민을 지칭할 때 쓰도록 돼 있지만, 원래는 재일동포에만 붙던 말이다.

‘같을 동(同)’에는 일제 치하 어쩔 수 없이 끌려간 핏줄이라는 애절한 뉘앙스가 담겨 있다. 반면 재미동포들은 1960, 70년대 그래도 사정이 나은 사람들이었다는 뜻에서 자연스럽게 ‘붙어 살 교(僑)’가 붙여져 교포로 불렸다. 화교(華僑)와 같은 쓰임새다.

내친 김에 더 들자면 ‘조선족’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재중동포라는 어휘에는 간도지방을 중심으로 그들이 겪었을 간난의 역사가 휘발돼 있다.

일전 장애인을 위한 봉사단체에서 장애인이란 용어를, 모두가 사랑하고 사랑 받아야 하는 사람이란 뜻의 ‘사랑인’으로 바꾸는 캠페인을 하겠다며 자문을 구해온 적이 있었다. “취지는 좋으나 중요한 것은 실질적인 여건 개선이지, 본래 의미를 상실한 작위적 용어는 실효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답해주었다.

좋은 게 좋은, 어찌 보면 사소한 사안에 과민 반응한다는 얘기를 들을 지도 모르겠다. 하긴 언어학에서도 ‘일물일어(一物一語)’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낡은 명제이긴 하다. 요즘의 후기구조주의 언어이론에선 의미가 계속 확장되고 변용돼 고정된 의미 중심이 없는 모호함을 현대 언어의 특징으로 규정하고 있을 정도니까.

그렇더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처음 용어의 의미가 변질되고, 그렇게 해서 명(名)과 실(實)이 자꾸만 괴리되어가는 현상이, 진정성을 잃어가는 우리 삶의 한 반영인 것 같아 씁쓸하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매일 지겹도록 접하는, 진짜 명실이 상부(相符)하지 않은 용어는 따로 있다. ‘참여정부’니, ‘열린 우리’니, ‘한나라’니 하는 그 것들….

이준희 문화부장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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