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밤 요르단 수도 암만의 최고급 호텔인 래디슨호텔 대연회장에서는 결혼식 피로연이 한창이었다. 신랑 신부가 나란히 입장하는 가운데 여성들이 전통에 따라 축가를 불렀고, 하객들은 탬버린에 맞춰 춤을 추며 흥겨운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밤 9시 2분 여가 지날 무렵 옷 속에 폭탄 띠를 두른 남성이 경찰 눈을 피해 연회장으로 스며들었다. 이어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고, 연회장은 순식간에 유혈이 낭자한 비극의 장소로 변했다.
그 동안 테러 안전지대로 꼽혀온 요르단의 연쇄 자폭테러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날 래디슨호텔에서 시작된 자폭테러는 1㎞ 떨어진 그랜드하얏트 호텔 로비와 인근 데이즈인 호텔 밖 차량폭탄 테러로 거의 동시에 이어졌다. 알 카에다 테러 공포가 요르단을 강타하는 순간이 됐다.
최소 56명이 숨지고 115명이 부상했다고 AP통신은 보도했다. BBC는 “최소 300여명이 부상했다”고 전했다. AFP통신은 “수명의 용의자 체포돼 조사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서방 분석가들은 이번 테러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요르단의 지정학적 위치와 최근 정책들이 테러를 잉태했다는 것이다.
요르단은 시리아와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 이라크, 요르단강 서안에 접한 매우 미묘한 곳에 있다. 이 탓에 당국은 알 카에다 등 무장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최근 과격세력이 본격 움직이면서 요르단 내 치안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고 BBC 등은 분석했다.
과격세력이 요르단을 노려온 이유는 여러 가지다. 압둘라 2세 국왕의 철저한 친미정책과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 체결 등은 직접적 요인에 속한다. 이라크 경찰 훈련장소 및 미군의 이라크 물자수송로 제공 등은 반미감정을 더욱 자극했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관계악화와 미국의 대 시리아 압박 강화 등이 불만을 품은 과격세력을 끌어들였다는 시각도 있다. 요르단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27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거주하고 있다.
요르단에선 이전에도 이슬람 과격세력에 의한 유사 테러가 발생했다. 지난 8월에는 아카바항에 정박 중인 미 함정에 3발의 로켓포가 발사됐다. 그보다 한달 앞서 관광객, 호텔에 대한 테러를 모의한 혐의로 5명이 기소됐다. 2004년에는 알 카에다에 의한 화학무기 공격이 사전 발각됐으며, 2002년에는 미 외교관이 알 자르카위 소행으로 추정되는 테러로 사망했다. 2000년 밀레니엄을 앞두고도 4개 호텔에 대한 알 카에다의 테러음모가 드러났다.
이런 정황 때문에 이번 테러의 배후로 즉시 알 카에다가 지목되고 있다. 이라크 알-카에다는 이날 웹 사이트 성명에서 “최고 용사들이 일부 소굴들에 대한 새 공격을 시작했다”며 “유대인과 십자군의 뒤뜰로 바뀐 호텔들이 목표물로 선정됐다”고 주장했다. 자살폭탄이란 테러수법이나 서방인을 겨냥한 테러 등은 알 카에다의 흔한 수법이다.
요르단 마르완 무아셰르 부총리는 “요르단 태생으로 이라크 알 카에다를 이끄는 알 자르카위가 강력한 용의자”라고 밝혔다. 알 자르카위는 지난해 4월 웹 사이트를 통해 “요르단에서 몇 차례 실패한 테러가 자신의 소행”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이번 호텔테러와 유사한 2000년 밀레니엄 테러의 배후로도 알려져 있다. 알 자르카위는 궐석재판에서 사형이 확정돼 있고 2,500만 달러의 현상금이 붙어 있다
이태규 기자 tg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