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러난 비리실태
두산그룹 총수 일가가 기업자금을 마치 사(私)금고처럼 이용해온 비리 실태가 검찰 수사를 통해 낱낱이 확인됐다. 두산의 ‘아름다운 형제경영’ 이미지 뒤에 숨어있던 전근대적 가족경영의 폐해와 문제점이 명백히 드러났다.
비자금 분배 및 사용처 박용오, 용성, 용만 형제는 1995년부터 가족 공동의 비자금을 조직적으로 만들어 관리했고, 이렇게 조성된 비자금은 박두병 초대회장이 작고했을 때 유산분배 비율에 따라 형제들에게 나눠 지급됐다. 장남 1.5:차남 이하 1:차녀 0.5 식이다.
이생그룹으로 독립해 나간 막내 박용욱 회장을 제외한 6남매는 이처럼 비자금을 매월 생활비로 평균 600만~700만원씩, 매년 5월에는 8,000만원씩 뭉칫돈으로 나눠 가졌다. 매월 생활비는 개인계좌로 월급처럼 지급됐고, 뭉칫돈은 그룹 비서실 직원이나 운전기사를 통해 전달됐다. 검찰 관계자는 “가족 공동의 비자금은 그룹 본사 회장실과 부회장실 사이에 있던 철제금고에 보관돼 그때그때 현금으로 지급됐다”고 말했다.
비자금 조성ㆍ관리ㆍ분배를 챙기는 ‘집사’ 역할은 박용성 전 회장이 맡았다. 검찰이 “누군가를 구속해야 한다면 박용성 전 회장”이라고 밝힌 것은 이 때문이었다. 박 전 회장은 나중에 아들인 박진원 두산인프라코어 상무에게 그 역할을 대물림 했다. 그러나 박용곤 명예회장 등 다른 형제는 조사를 받으면서 비자금 조성 사실을 몰랐다고 해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비자금 326억원은 총수 일가 생활비(107억원), 세금 같은 가족공동경비(37억원), 대출금 이자 대납(139억원) 등으로 대부분 사용됐다. 시효가 지나 공소사실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건설 경기가 호황이던 90년대 초반에도 480억원의 비자금이 조성된 사실이 드러나 총수 일가의 호주머니로 들어간 돈은 326억원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자금 조성수법 두산은 위장계열사에 그룹의 경비 또는 운송업무를 독점하게 하고, 하청업체에 대금을 부풀려 지급한 뒤 되돌려 받는 등의 수법으로 비자금을 만들었다. 96년 설립된 위장계열사 세계물류는 처음부터 총수 일가 생활비 조달 목적으로 세워졌다는 것이 검찰의 시각이다.
두산은 또 건설계열사인 두산산업개발(옛 두산건설)을 통해 외주 공사비를 과다 지급한 뒤 돌려 받는 수법으로 비자금 230억원을 조성했다. 95년 두산건설 대표이사가 회사에 내기로 했던 변상금 29억원도 박용오ㆍ용성 전 회장이 횡령한 것으로 드러났다.
비윤리적 경영 실태 총수 일가가 비자금 분배를 시작한 95년은 두산건설이 저가 수주 등으로 계속 적자가 발생해 관급공사 입찰기준에 미달할 위기에 놓이자 분식회계를 시작한 해와 정확히 일치한다. 회사는 부실로 멍드는데 총수 일가는 거액의 회사자금을 빼돌려 쓴 것이다. 총수 일가는 두산건설의 유상증자로 지분율이 24.3%에서 8.1%로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자 4세들 명의로 거액을 대출 받아 유상증자에 참여한 뒤 회사에 대출금 이자를 대납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소수의 지분만으로 그룹 경영을 장악할 수 있는 재벌 체제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 검찰의 설명이다. 순환출자구조로 구성된 두산그룹의 총수 일가가 보유한 지분은 7월말 현재 두산산업개발 7.52%, ㈜두산 18.22%, 두산중공업 0.02%에 불과하다
김영화 기자 yaaho@hk.co.kr
■ 아쉬운 수사 결과
두산그룹 비리의혹 수사는 박용오 박용성 형제가 제기한 ‘폭로전’의 진위를 확인하는 수준으로 마무리됐다. 회사 돈을 장기간 총수일가의 생활비로 나눠 써온 ‘파렴치한 범죄’가 확인됐지만, 굴지의 재벌 수사 결과로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는 지적이다.
우선 두산그룹이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인수 과정에서 정ㆍ관계 로비를 했다는 의혹에 대한 수사 기대가 높았으나 검찰은 “진정서에 포함된 부분이 아니어서 수사하지 않았다”고 한계선을 그었다.
박용만 부회장은 2001년 2월 한국중공업 인수를 추진할 당시 산업자원부 주무 과장의 동생을 취직시켜준 혐의가 밝혀져 2003년 11월 약식기소 되기도 했다. 검찰은 당시 서울지검 특수3부에서 수사했던 관련 사건기록까지 끄집어내 검토했으나 결국 한국중공업 인수로비 의혹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진정서와 고발내용만을 중심으로 수사가 진행됐기 때문에 외부폭로에 근거하지 않고 순전히 검찰이 밝혀낸 부분은 위장 계열사 세계물류를 통해 조성한 비자금 48억원이 고작이다.
비자금이 총수일가 생활비에 쓰였다는 것도 낱낱이 밝혀졌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측면이 있다. 총수일가 6남매가 매달 600만~700만원씩, 또 매년 한차례 8,000만원씩 비자금을 나눠 가진 것까지는 확인했지만, 이들이 그 돈을 어떤 명목으로 사용했는지는 밝히지 못했다. 검찰은 “그 돈을 식료품을 사는데 썼는지, 헬스비용으로 썼는지까지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며 “거액이 일시에 지급된 것이 아니라 조금씩 정기적으로 배달된 것으로 미뤄 생활비로 쓰였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번 수사를 스스로 ‘기업수사방식에 대한 새로운 모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검찰은 보도자료에서 “살아있는 기업에 대한 ‘해부식 수사’가 아니라 ‘정밀외과 수술식 수사’를 지향해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수사 효과를 극대화했다”고 설명했다.
기존 기업수사는 전격적인 압수수색과 신병확보 등을 통해 기업을 파헤치는 방식이어서 부작용이 많았지만, 이번 수사는 양쪽의 의견을 충분히 청취하고 압수수색을 최소화하는 등 새로운 기업수사 방식을 수립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수사 방식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사건의 성격을 애초부터 ‘진정 사건’으로 규정해 적극적인 수사의지를 보이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한편 참여연대는 검찰이 고려산업개발 주가조작 의혹 등을 무혐의 처분한데 대해 즉각 항고하겠다고 밝혔다
이진희 기자 river@hk.co.kr
■ 두산, 8人 비상경영위 가동
두산그룹이 비상경영위원회를 본격 가동했다.
두산그룹은 검찰 수사 결과가 발표된 직후인 10일 오후 사장단 회의를 열고 유병택 ㈜두산 부회장 등 8명으로 비상경영위를 구성, 지배구조개선 작업에 들어갔다. 비상경영위는 유 부회장를 위원장으로 김대중 두산중공업㈜ 사장, 최승철 두산인프라코어㈜ 사장, 강태순ㆍ장영균ㆍ정지택ㆍ최태경ㆍ김 진 ㈜두산 사장 등 7명의 위원으로 구성됐다.
비상경영위는 이날 ▦혁신적인 지배구조 개선 ▦투명경영 확보 등의 2대 혁신과제를 선정했으며 이를 위해 산하에 2개의 태스크포스팀(TFT)을 구성했다.
지배구조개선 TFT는 새로운 지배구조 모델 및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수립한다. 투명경영 TFT는 기업내부 투명성 및 계열사 등 내부자간 거래의 투명성 확보에 초점을 맞춰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투명경영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다.
비상경영위는 투명한 지배구조를 갖추기 위해 장기적으로는 LG그룹식의 지주회사로 가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처럼 법적인 지주회사 체제를 갖추기 위해서는 지주회사가 상장 계열사 경우 30%, 비상장사의 경우 50%의 지분을 확보해야 하는 만큼 자금 부담이 커 현실적으론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때문에 대안으로 사외이사 비율 확대와 계열사별 독립경영 체제를 갖추는 SK그룹 방식과 외국의 모델을 놓고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고위 경제관료 출신의 외부 인사를 영입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두산그룹 관계자는 “현재로선 아무 것도 결정된 것이 없으며 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하나씩 점검을 해나갈 것”이라며 “설사 어느 누가 차기 그룹 회장에 선임된다 해도 혼자 모든 의사결정을 하는 과거식의 총수 역할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고 박두병 초대회장의 4남 박용현 서울대 의대 교수 등 총수 일가에서 차기 그룹 회장이 나올 수도 있다는 의미다.
비상경영위가 한시적으로 그룹 경영을 한 뒤 4세 경영이 본격화할 수도 있다는 분석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40대 중반에 들어선 박용곤 그룹 명예회장의 장남인 박정원(43) 두산산업개발 부회장 등이 경영 일선에 포진해있기 때문이다.
박용성 전 회장의 차남 석원(33)씨는 최근 두산중공업 차장에서 부장으로 승진했다. 두산그룹측은 “벌써 4세 경영을 논하기는 어렵다”면서 “비상경영위는 대주주의 관여 없이 모든 사항을 독자적으로 추진하고 결정해 국민과 주주, 고객으로부터 신뢰 받는 기업을 만들어 나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황양준 기자 naige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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