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현의 첫 시집 ‘내 몸이 유적이다’(2002)는 제3부에 실린 ‘새’의 마지막 행 “내 몸이 저 새의 유적이다”에서 표제를 따왔다. 열어놓은 창을 통해 화자의 방으로 날아 들어온 새가 다시 창을 통해 밖으로 나가기까지의 궤적과 그것을 좇는 화자의 시선을 그린 이 시는 그러나 이순현 시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암시적 이미지들의 반사광선으로 반짝이는 마지막 연 “아래의 열린 창으로 새가 날아간다/ 빛은 더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잠시 눈을 뜨던 사물들/ 깃털을 다 뽑힌 듯 그대로 얼어붙는다/ 내 눈은 새의 길을 좇아/ 쭉 달려나간다/ 텅 비는 내 안으로 푸른 공기들이 몰려들어/ 무수한 길을 낸다/ 내 몸이 저 새의 유적이다”가 인식론이나 ‘몸 철학’의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연일 뿐이다. 이 시집의 주된 관심은 그런 철학적 층위에 있지 않다.
‘내 몸이 유적이다’보다는 덜 우아할지라도, 이 시집에 더 어울리는 표제는 ‘말들의 풍경’이다. 아닌게아니라 시인은 이 제목의 작품을 제1부 끝머리쯤에 배치하고 있다.
시인의 눈에 비친 그 풍경 속에서, “젖을 빠는 입과 젖꼭지가 달린 유방처럼/ 자음과 모음이/ 요철(凹凸)로 결합한다.” 시집 뒤에 붙은 ‘말과 사물과 몸’이라는 제목의 해설은 이순현 시에서 “말과 사물의 간극이 몸을 통해 상호 침투하고 융합하”고 있음을 읽어낸다. 그것은 빗맞았달 수 없는 관찰이다.
서시 바로 다음에 배치된 ‘사과와 사과라는 말과’의 화자만 해도 “사과라는 말과/ 사과는/ 세계가 다르다// 그들은 내 입 안에서 만난다/ 침으로 뒤범벅이 되어”라고 진술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이순현의 어떤 시들이 ‘말과 사물과 몸의 시’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 몸이 유적이다’는 압도적으로 말의 시집이다. 시인의 관심은 말과 사물의 경계를 허무는 몸에 있다기보다, 말 자체에 있다. 설령 이 시집을 ‘몸의 시집’이라 부를 수 있다 하더라도, 이 시집에 거듭 등장하는 몸들 가운데 적잖은 수는 언어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있는 몸이다.
이순현에게 몸은, 서시 ‘내 몸처럼’에서 드러나듯, 고작 말의 보조관념일 때가 많다. 이럴 때 그의 시는 ‘언어와 몸’의 시라기보다 ‘언어의 몸’의 시가 된다. 게다가 말과 몸을 병렬시킬 때조차, 이 시집에서 몸은 말의 짝으로서보다 ‘에로그로(색정괴기)’의 자리로서 더 당당하다.
“인간의 꽃은 구순과 음순에서 피어난다 말과 몸은 한 배를 타고 난 형제다”(‘나는 여기 피어있고’) 같은 시행에서도 마찬가지다. 한편 그에게 사물은, ‘맨드라미’의 “맨드라미는// ‘꽃’ 하고 부르면/ ‘??’ 하며 따라오는/ 음성기호의 투박하고 탁한 느낌에 따라// ‘꽃’의/ 섬세한 갈피와 미로의 이미지를/ 스스로 검열하고 삭제 수정한 다음/ 육질의 덩어리만 남겨놓았다”라는 시행에서 보듯, 말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에겐 언어가 사물의 그림자가 아니라, 사물이 언어의 그림자다! 이순현은 세계에 다가가기 위해 언어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언어 위에, 언어의 형상에 맞춰 세계를 세운다. 아니 그에게는 언어가 그 자체로, 다시 말해 ‘세계’와의 관련을 갖지 않은 채로, 세계다.
그러니까 ‘내 몸이 유적이다’는 말에 관한 말이랄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시집의 화자들이 말을 탐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저 말과 더불어 놀 뿐이다. 허물없는 사람들과 은밀한 한담이라도 하듯 에로틱한 것과 그로테스크한 것을 버무릴 때나, 아니면 “모든 사이에/ <와> / 굴복시킬 수도 없는/ 추방할 수도 없는// 실존의 발원지”(‘나무 <와> 사람’)에서처럼 짐짓 철학자연할 때나, 이순현의 화자들이 몰두하는 것은 말과의 ‘놀이’다. 와> 와>
그 놀이가 형이상학으로 솟구치는 듯 보일 때, 그 형이상학은 포즈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그 놀이가 패설로 미끄러지는 듯 보일 때도, 그 패설 역시 파적(破寂)을 위한 제스처일 뿐이다. 이순현의 화자들은 좀처럼 진지해지지 않는다. 그들이 진지함을 경멸할 수 있는 것은, 현실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언어의 놀이공원에만 머물기 때문이다.
그들이 “ㅓ/ㅏ. 대척지에서 서로 기대는 우주목처럼 너/는 서쪽으로 나/는 동쪽으로 가지를 뻗고 있잖아. 나/의 다른 쪽 비밀을 읽을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누구에게든 너/나, 는 함부로 될 수 없지 않겠니”(‘너/나’)라고 말할 때든, 아니면 “새,/ ㅅ은 사람(人)처럼/ 바닥에 닿은 각도가 불안정하다/ 모음 ㅐ는 속을 비우고/ 가벼운 뼈대가 되어/ 불안정한 각도를 떠받친다/ 뒤뚱, 뒤뚱, 이륙과 착륙을 반복한다”(‘거기 있다’)고 말할 때든, 독자들이 거기서 마르틴 부버의 사회철학이나 장 피아제의 인식론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이 시들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한글 홀소리글자 ‘ㅓ’와 ‘ㅏ’의 꼴, 그리고 ‘새’라는 글자의 생김새에 바탕을 둔 말놀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들의 화자들은 인용?시행들의 앞뒤에 독자들을 지적으로 자극할 법한 이미지와 진술을 요란하게 배치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 홀려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독자들의 교양속물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한 시인의 ‘서비스’에 지나지 않는다. ‘내 몸이 유적이다’를 가장 잘 읽는 방법은 시인의 말놀이에 동참해 그것을 즐기는 것이다.
그 말놀이의 극점에 있는 시 가운데 하나가 ‘기역을 중심으로’다. 이 시의 화자에 따르면 ‘ㄱ’은 “홀로 서지 못하고 영원히/ 모음의/ 오지랖이나 발치에 빌붙어 살아간”다. 아닌게아니라 우리말 자음은, 그것을 ‘닿소리’라고도 부르는 데서도 알 수 있듯, 모음의 도움 없이 홀로는 소리를 내지 못한다.
‘ㄱ’을 ‘기역’이라고 읽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이 글자의 이름을 읽는 것이지 ‘ㄱ’ 자체의 소리값을 내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화자는, 셋째 연에서, 모음의 오지랖이나 발치에 빌붙은 ‘ㄱ’을 나열한다. “ㄱ이 받치고 선/.../ 개혁/ 자의식/ 교각/ 가족/ 교육/ 쾌락/ 권력/ 마약/ 묵시록/...”
그러던 화자는 문득 “토대가 불안하다”고 느낀다. 여기서 토대란 물론 ‘ㄱ’인데, 그 굽어진 생김새가 영 안정감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ㄱ을 두드려 편다.” 펴고 나니, 그 ‘ㄱ’들은 “ㅡㅡㅡㅡㅡㅡㅡㅡ...” 형상이 된다. 그 형상은, 뜻밖에도, “으으으으으으으으....”라는 신음소리로 바뀌며, “곳곳이 붕괴된다.” 불안하게 굽은 ‘ㄱ’을 안정감 있게 ‘ㅡ’로 펴놓은 순간, 도리어 그 위의 건조물들이 무너져내려 버린 것이다.
그 무너지는 건조물들은 개혁, 교각, 가족, 교육 같은 것이다. 그 결과는 당연히 “아비규환(阿鼻叫喚)/ --여기요, 여기!”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이나 9.11 테러를 떠올리면, 이 아비규환 속의 구조 요청을 상상할 수 있다. 문이라도 보이면 그리로 탈출하련만, 문은 도대체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화자는 이렇게 투덜대며 시를 마무리한다. “ㄱ이 받치고 서 있던 세계/ 도대체 들고나는 문은/ 어디 있었던 거지?”
우리 사회의 가족이나 교육이나 교각의 부실함에 대한 야유를, 또는 개혁의 섣부름에 대한 염려를 이 시에서 읽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재미없는 읽기다. 이 시의 ‘교각’이나 ‘개혁’은 성수대교나 국가보안법 폐지 같은 세상 속의 사물이나 사태이기에 앞서 “ㄱ이 떠받치고 선” 말이기 때문이다.
이 말들은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자기지시적이고 재귀적이다. 아주 너그러운 독자라면, 이 말들이 사물과 자신을 동시에 가리킨다고 해석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중의(重義)의 수사에 시인은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 예외적으로 중의성이 발휘된 ‘폭포’라는 시에서조차, 폭포는 그림이나 영화(음악) 속의 폭포이거나, 김수영의 시 ‘폭포’이거나, “두 ㅍ”을 거느린 채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안에도/ 바깥에도” 존재하는 저 자신(다시 말해 ‘폭포’라는 말)일 뿐, 현실의 폭포는 아니다.
세상을 향해 날아가는 대신 제 몸뚱이로 귀환하는 말들을 수두룩하게 품고 있는 시집이 ‘내 몸이 유적이다’ 이전에는 없었다. 그것이 이 시집의 가장 큰 미덕이지만, 이 미덕은 거듭되면 악덕으로 굴러 떨어질 미덕이다. 말하자면 이 미덕은 ‘내 몸이 유적이다’ 한 권의 시집에 갇혀있을 때 빛을 내뿜는 미덕이다.
‘내 몸이 유적이다’를 읽는 것은 즐겁다. 거기서는 권태를 쉬이 견디지 못하는, 아니 권태를 꿰뚫어버리는 경쾌의 정신이 느껴진다. 이 시집은 프랑스 모랄리스트들이 ‘에스프리’나 ‘에클레르’라고 불렀던, 날쌘 만큼이나 매혹적인 지적 섬광으로 번쩍인다.
▲ 내 몸처럼 --서시
보내주신 글 잘 받았습니다
겉으로는 뿌리까지 고스란히 읽어낼 수 없어
메스로 글 하나하나를 절개합니다
절개면은 또다른 겉이 되고
또다른 메스를 부릅니다
여기저기 도려내고 가르다보니
솟구치는 피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엉겁결에 헤쳐놓은 글들을 한꺼번에 쓸어넣고
질긴 실로 촘촘하게 기웠습니다
흉터투성이 글의 가장자리에
둥근 고리를 꿰고
몸의 열기로 여는 자물쇠를 달아둡니다
잠긴 것을 열 때마다
달아오르는 지문으로 더듬습니다
실어보내신 의미를
환하게 열 수는 없을 것 같아
내 몸처럼 어디든 챙겨들고 다닙니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