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와 기교만이 승하기 십상인 현대극에서 모처럼 잘 씌어진 희곡의 가치를 새삼 느끼게 하는 연극이 국내관객을 만난다. 1998년 더블린연극제 희곡상, 2005년 올리비에상 최우수 희곡상 등을 수상한 아일랜드 극작가 마리나 카의 작품 ‘고양이 늪’을 극단 물리가 초연한다.
고대 그리스 비극 ‘메디아’의 모티브를 현대 아일랜드의 습지에다 옮겨놓은 작품은 안락한 삶에 눈 멀어 조강지처와 딸을 버리는 남편에 대한 처절한 복수의 이야기다. 잔인한 운명에 허물어지는 등장 인물들의 대사 하나하나가 다 송곳 같다.
자신에게 적대적인 운명에 대한 복수로 그녀가 택한 것은 죽음이다. “나처럼 되게 하진 않을 거야. 평생 오지 않을 누군가를 기다리게 하진 않아. 눈 감아.” 그리고는 칼로 딸의 목숨을 거둔다. 자신이 죽은 뒤 원수 같은 인간들에게 딸을 남길 수 없어서다.
‘레이디 맥베스’, ‘배장화 배홍련’ 등 페미니즘의 색채가 농후한 일련의 연극을 무대에 올려 화제를 불려 일으켰던 연출가 한태숙씨가 더 밀도를 높여 만든 무대는 어둠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한씨는 “희곡은 모티브를 빌어온 메디아 신화보다도 훨씬 더 강렬하고 섬세하다”고 말했다.
죽임과 죽음의 광기가 넘쳐 나는 무대의 주인은 헤스터 역의 서이숙(37). 갈대처럼 가냘퍼 보이는 그가 강철보다 강인한 여인을 연기한다. 그의 절규는 극장 공간을 압도한다.
공호석 지영란 이연규 등 연기파 배우들이 출연. 13일까지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 화~금 오후 7시30분, 토 오후 4시.7시30분, 일 3시. (02)744-7304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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