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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과 함께 보낸 30년 김영태 "러브레터 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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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과 함께 보낸 30년 김영태 "러브레터 왔네요"

입력
2005.1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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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혜화동 로터리의 찻집 엘빈. 문 열고 들어가면 바로 앞 벽에 토슈즈 그림이 걸려있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시인 겸 무용평론가 김영태(70)씨 작품이다.

바로 옆 건물에 집필실을 갖고 있는 그는 매일 점심 먹고 이 집에 들러 그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신다. 가방에는 신문 뭉치가 들어있다. 매일 7개 일간지를 보면서 무용 관련 기사는 전부 스크랩한다. 오후 5시, 그는 집필실을 나와 춤을 보러 극장으로 간다.

아르코예술극장(구 문예회관) 대극장 가열 123번. 극장 맨 왼쪽 통로, 그가 30년 넘게 앉아온 그 자리는 극장 리모델링 이후 L 11번이 됐다. 의자 깊숙히 몸을 묻은 채 무대에서 춤추는 사람의 솜털까지 보이는 독일제 망원경으로 본다. 그리고 일기 쓰듯 매일 쓴다. 시인의 상상력으로 춤과 춤꾼에게 바치는 러브레터인 셈이다. 그에게 춤이 없다면? 살짝 한숨 쉬듯 대답을 흘린다. “못 살 것 같아요.”

대학 시절, 광화문의 외국 서점에서 우연히 본 무용 사진첩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춤에 빠진 것이다. 눈 뜨면 잠 잘 때까지 종일 춤 생각, 그는 그렇게 살아왔다.

“어쩌다 보니 어느 새 70이네요. 본업은 시인데, 여기저기 편력하다가 1969년부터는 무용 쪽에 주저 앉았지요. 후회는 없어요. 딴 데 한 눈 팔지 않고 이 동네에서 몸 비비며 살아왔으니까. 거의 매일 공연 보러 다녔는데, 요새는 몸이 좀 안 좋아서 몇 개 못 봤어요. 제일 친했던 최현(무용가)이 73세에 갔으니 나도 그때까지만 살아야지.”

그가 쓰는 무용평이 두서 없는 넋두리 같다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오로지 춤을 향한 그의 순정은 아무도 의심하지 못 한다. ‘춤타래’ ‘툇마루’ 등 그가 이름 지어준 무용단이 10여 개는 된다. 무용가들은 그의 시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자칭 ‘봉두난발체’라는, 쓸쓸하게 춤추듯 흔들리는 그의 독특한 서체는 무용 팸플릿과 전단에 자주 등장한다.

수십 년 한결같은 그의 사랑에 무용가들이 화답한다. 11~12일 저녁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열리는 ‘우리 시대의 무용가 2005’는 고희를 맞은 그에게 무용가 7인이 각각 독무를 바치는 무대다. 공연의 부제 ‘세상을 홀로 걷는 춤, 솔로’는 그가 붙인 것이다. 그가 ‘나의 뮤즈들’이라고 부르는 황희연 김순정 조정희를 비롯해 남정호 이윤석 윤성주 김윤정이 발레, 현대 무용, 한국 무용 등으로 꾸미는 자리다.

“제겐 과분하죠. 춤을 위해 살았던 아웃사이더에 대한 우정의 배려일 텐데, 쑥스럽고 고마울 뿐이죠.”

그는 지금까지 17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다. 고희를 맞아 평생 써 온 시를 모은 선집 ‘물거품을 마시면서 아껴가면서’ 가 이번 주에 나온다(천년의시작). 무용평은 1969년부터 썼다. 그 전부터 그가 모아온 무용 관련 자료는 지난 주 서초동의 예술의전당 내 예술자료관으로 갔다. 1956년부터 2001년까지 연도별로 정리한 무용 관련 기사 스크랩에는 1970년대 영국 로열발레단의 내한 공연 광고까지 들어있다. 여기에 공연 팸플릿, 책, 직접 스케치한 예술가 110인의 초상 등 분량이 작은 트럭으로 세 대쯤 된다.

“누가 술김에 저한테 주정을 하대요. 물거품을 마시는 사람도 없지만, 그걸 아껴가며 마시는 사람은 더욱 없다고. 남들이 손 안 대는 맹물 같은 것을 마시면서, 그것도 아껴가면서 살았어요. 돌이켜보면 허무 같은 거지요. 시로도 썼지만 ‘여기까지 와서 보니 장식이었다’ 싶고…. 재킷에 매단 브로치처럼. 그래도 문화 변방에서 장식 역할 정도는 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의 아호는 ‘초개눌인(草芥訥人)’, ‘지푸라기처럼 보잘것없는 어눌한 사람’이란 뜻이다. 한 산문에서 ‘나는 아름다움을 훔치러 다니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초개눌인은 오늘도 아름다움을 훔치러 극장으로 간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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