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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38) 진실의 봉인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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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38) 진실의 봉인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입력
2005.1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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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성자(聖子)’라 불리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희생’이나 ‘노스탤지어’ ‘혹성 솔라리스’ 등을 보려고 몇 번 시도한 적은 있지만, 세 편 모두 중간에 잠이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물과 바람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들만을 포착해내는 듯한 그의 영화는 스토리는 고사하고 어느 한 대상이나 인물에 집중하기 힘들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영화를 보면서 30분 이상 잠이 들었거나 적어도 두 세 번 쯤 ‘빨리 감기’ 버튼을 눌렀다는 공통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세계에 대해서 얘기를 한다는 건 나로선 주제넘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몇 개의 크고 작은 이미지들로만 뇌리에 남아있는 그의 영화들이 늦가을의 스산하고도 너그러운 풍광들 속에서 불현듯 되살아나는 것을 목도하며 자꾸만 입(보다는 마음)이 근질근질해지는 걸 참을 수 없다. 그래서 무모함을 무릅쓰고, 타르코프스키에 대해서 쓴다.

그랬더니, 시간이 약간, 마치 타르코프스키가 빚어낸 풍경들이 그랬듯, 일상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속도감을 갖기 시작한다. 그건 일상보다 빠르거나 늦다는 것으로는 완전한 설명이 불가능한, 분명하게 이질적인 ‘다른 시간’이다.

지구의 특정한 시간대와 공간을 배경으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타르코프스키가 ‘봉인’한 시간은 내게 대기권 바깥의 다른 별의 생태학으로 여겨진다.

지구에 출장 온 어느 다정다감한 외계인의 시선인 양 낯설지만, 그 낯섦은 세계의 다채로운 표면들을 명료하게 응집된 정신의 소실점 속에 투과시켜 인간의 보편적 심성과 그 속에 숨겨진 신성(神聖)을 물질화하려는 특별한 노력의 산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타르코프스키 영화가 낯설게 여겨지는 건 인간 본연의 숭고와 겸양을 새삼 확인한 자의 수줍고도 자기반성적인 알러지 반응 같은 건지도 모른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그건 현세의 인류가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자연적 감성과 숭고의 윤리를 내팽개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부드러운 고발이나 진배없다. 때문에 나는 그의 영화를 보며 잠들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부끄럽지만은 않다.

내가 보건대,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계에 만연한 폭력과 이기주의와 비참과 공포로부터 눈을 감고(또는, 눈을 감음으로써 더 명징하게 응시하고) 보다 깊고 따뜻하고 보편적인 세계의 흐름에 동참하라는 의도에서 그토록 느리고, 텅 비어있고, 고요한 세계를 창조해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그 환한 적막과 느린 호소를 마주하면서 잠들지 않는 건 지나치게 뻔뻔한 자의식이다.

그의 영화를 보면서 나를 잠들 게 하는 건 내 속에 잠들어 있는 어느 ‘착한 괴물’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알게 모르게, 자의든 타의든 유기해버린 그 ‘착한 괴물’의 잠을 깨우면서 바로 그것이 진짜 너 자신이 아니겠냐고 묻는다.

그런데 그 묵직하고도 날카로운 질문은 묵묵한 침묵 속에서 살랑거리는 작지만 투명한 바람소리를 닮았다. 잠이 든 나는 이승의 번다한 지층 아래로 흐르는 특별한 적막과 만난다. 그의 영화는 백일몽처럼 드리워지는 이 세계의 보다 높고 푸른 궁륭과도 같다.

“대체로 내 영화들이 다루고 있는 문제들이란 인간은 비어 있는 세계의 지붕 밑에 외롭고 고독하게 동떨어져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과거와 미래로 연결된 수많은 끈들과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소위 세계와 인류의 운명과 연관지을 수 있다는 점이다.”

위의 문장은 타르코프스키의 자서전 ‘봉인된 시간’(김창우 옮김, 분도출판사)에서 발췌한 것이지만, 그의 문장을 그의 영화에 대한 주해나 알리바이로만 읽는 건 그다지 옳지 않다. ‘봉인된 시간’은 대개의 예술가 자서전이 그렇듯, 자신의 예술과 삶 전반에 대한 근원적 탐구로 일관하고 있음에도 모종의 자기현시나 과장이 없다.

적어도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 잉마르 베리만의 자서전 ‘마법의 등’(민승남 옮김, 이론과실천사)이 편집증적인 자기해명과 분석으로 인해 한 편의 치밀한 심리극을 연상케 한다는 점과 비교했을 때 타르코프스키의 담백하고도 진솔한 고백들은 놀라울 정도로 냉철하고 품이 크다.

그는 스스로를 응시할 때조차 자기 자신 너머에 있는 세계 전체의 보편성을 향해 시선을 ‘롱테이크’한다. 때문에 그의 발언들을 통해 정작 듣게 되는 건 한 개인의 삶에 관한 특별한 존재증명이 아니라 이 세계 자체의 구성원리와 인류의 존재방식에 대한 근원적이고도 섬려한 재고이다.

그 재고의 방식은 한없이 길게 이어지는 수평의 대지 위를 느리게 조망하는 듯한 그의 영상들처럼 나직하고 넓다. 그건 그가 자신의 영화를 설명하면서 얘기한 ‘시적 고리’와도 유사하다.

‘시적 고리’란 이성적 논리체계를 초월한 시적 이미지들 사이의 고리를 의미한다. 멈춰있는 듯 보이는 대상이나 공간은 그러나 전혀 멈춰있는 것이 아니다.

사물들은 저마다 자기 나름의 시간을 품고 있다. 타르코프스키는 그 숨죽인 시간 깊숙이 잠행하여 사물의 숨겨진 본성을 일깨우는 방식으로 기나긴 침묵 속에서 비로소 풀려나오는 새로운 시간을 발견하게 한다.

그렇게 새로 탄생한 시간은 통상적인 일방향의 흐름에서 이탈해 저만의 독자적인 생명력을 드러낸다. 한없이 정지된 듯하면서도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고, 더 없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속 깊은 말을 풀어내는 듯한 타르코프스키의 예술적이고도 인간적인 특징은 그의 자서전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타르코프스키에게 ‘시적 고리’란 그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기 위한 기술적 원칙을 넘어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세계관의 투영이나 다름없다.

대개의 자서전들이 출생부터 만년까지의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씌어지는 것과는 달리 ‘봉인된 시간’은 예술창작과 관련된 생각들을 에세이형식으로 풀면서 그 배면에 깔려있는 자신의 삶을 은은하게 밝힌다. 그런 점에서 ‘봉인된 시간’이 씌어진 방식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적 형식과도 일치한다.

타르코프스키 스스로도 ‘한 인간의 미학적 친화력은 때때로 예술 작품 그 자체에 관해서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 관해서 훨씬 더 많이 이야기하곤 한다’고 쓰고 있듯, ‘봉인된 시간’은 예술의 궁극이 삶의 궁극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묵직하게 증언하고 있다.

아울러 그 증언이 경직된 주장이나 열렬한 호소가 아닌, 크고 깊은 시선과 오래도록 곰삭은 체온으로 인화해낸 삶의 보편적 진실에 대한 객관적 증거물이란 점에서 타르코프스키가 가진 설득력의 농도는 더 짙어진다.

적어도 내 경험 상, 예술의 궁극을 얘기하며 삶의 본질을 꿰어내고 삶의 벌거벗은 진실을 통해 보편적인 신성을 실질적으로 감득하게 한 예술가의 글은 ‘봉인된 시간’이 유일하다.

10여 년 전 처음 읽은 이 책은 아직도 내게 섬뜩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자기가책과 그 누구보다도 온화하고 따뜻한 숨결을 동시에 일깨워준다.

그건 흡사 삶의 분방한 오욕에 지칠 대로 지쳐 잠이 든 이마를 자근자근 짚어주는 크고 부드러운 손과도 같다. 열에 달뜬 마음엔 서늘한 바람으로 스미고 차갑게 경직된 몸엔 따뜻한 햇살처럼 감기며 주위를 둘러싼 모든 풍경들을 불현듯 개안한 눈으로 다시 보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영화를 보며 잠이 드는 건 문명이 유발한 현세의 안구건조증이 다소나마 치유되며 발생하는 일시적인 장애일지도 모른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아무래도 그 길고 긴 러닝타임만큼이나 장기복용해야 할 듯하다.

타르코프스키에게 이끌려 들어가는 잠은 현실의 바깥이 아니라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은 이 세상의 더 깊은 속이다. 그 깊은 세계의 더 투명한 표면을 바라보며 나의 감은 눈은 더 커진다.

타르코프스키는 그 둥그런 우물 속에 ‘내’가 아니라 '세계‘가 들어차게 한다. 그 무심하고도 투명한 화면을 보며 잠결에 느꼈던 부양감이 비몽사몽의 환각이 아님을 지금도 믿는 한, 그의 영화는 분명 이 세상이 감추고 있는 차원 높은 진실의 ‘봉인’임에 분명하다.

봉인이 풀리는 순간, 세상은 분명 그 이전과는 다른 생명력으로 새롭게 번창할 것이다. 잠 속의 세상이 잠 밖의 이면이듯, 이 세상은 여전히 다른 세상의 이면이다.

시인 nietz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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