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은 통상 자연과 생명, 평화와 안전을 의미한다. 보행신호나 비상구 표시가 녹색인 것이나 환경운동단체들이 ‘녹색’ 혹은 ‘그린’이라는 명칭을 애용하는 이유다.
동시에 녹색은 공포와 신비의 색이기도 하다. 중세 유럽에서 반(反)그리스도가 녹색 눈동자로 표현된 것이나, 공상과학영화에서 외계인이 흔히 녹색의 생명체로 그려지는 것을 생각해보라(팀 버튼 감독의 ‘화성침공’ 외계인은 녹색피를 흘린다).
젊은 작가 송명진의 작품이 눈길을 끄는 것은 언뜻 평온해 보이는 녹색의 자기 전복성, 화면 가득한 녹색이 자아내는 기묘한 불안감과 통념에서 출발했으되 끊임없이 통념을 배반하는 열린 상상의 공간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금호미술관에서 열리고있는 송명진 개인전 ‘풍경의 표면’전은 관객을 온통 녹색 꿈의 공간으로 끌어들인다. 그림들은 모두 작가가 집 앞 강변의 풀밭 길을 매일 아침 산책하면서 본 일상의 풍경을 담고있다. 개천을 따라 난 길, 여름날의 짙푸른 식물들, 교각아래 번지는 무성한 초지 등이다.
작가는 이 일상의 3차원 공간을 캔버스 위에 옮기면서 의도적으로 화면의 질감(마띠에르)을 말끔히 지워버린다. 반복된 붓질의 흔적을 통해 그림에 시간과 공력의 더께를 더하려는 기존 회화의 규범을 간단하게 날린 것이다.
덕분에 그림은 매우 평면적이어서 언뜻 무표정한 일러스트처럼 보인다. 시간성과 공간성이 사라진 진공 상태. 그 숨막힐 듯한 정지의 순간, 관객의 시선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것은 녹색 캔버스 한구석 표면을 찢고 올라온 듯한 사람의 형상이거나, 교각 다리를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식물의 이미지다.
공간을 시시각각 채워가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서서히 소멸해가는 녹색의 평면은 끝도 없이 이어진 반구, 혹은 무덤의 행렬이다.
사람 형상이라고는 해도 윤곽선만 그렇게 보일 뿐 실제로는 눈, 코, 입도 몸짓도 없다. 녹조식물의 일종인 청각이거니 추정될 뿐 식물의 이미지도 수천 수만배로 자기복제를 진행중인 듯한 탐욕스런 동물성으로 비쳐진다.
전후의 맥락을 일체 설명해주지 않는 낯선 그림들. 그러나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곧바로 무릎을 칠 만 하다. 그 불친절이 시종일관 관객의 상상적 개입을 요구하는 의도적 장치임을 깨닫게 될 터이므로.
미술평론가 강수미씨는 “송씨의 작업은 ‘사물이나 풍경을 낯설게 만들기’를 통해 감상자가 그림을 관조 하는 대신 캔버스의 정지화면 전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혹은 벌어질 것인가에 대해 적극적으로 구상하게 만든다”고 평가한다.
전시장 가득한 녹색의 평면들이 강박증적 악몽이 될 지, 즐거운 일탈의 경험이 될지는 그림 속 내러티브를 재구성하는 관객의 몫인 셈이다.
“강가에 살면서 녹색의 다양한 표정에 갈수록 매료된다”는 송씨는 “식물의 동물성, 평범한 일상의 비범성 등 기성관념을 비틀고 낯설게 만드는데 흥미를 느낀다”고 말했다. 송씨는 금호미술관이 유망한 신진작가들을 지원하는 영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 2기 출신으로 이번 전시는 금호미술관 초대로 이뤄졌다. 13일까지, (02)720-5114.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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