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적인 갈색 빛 때문일까. 갤러리 내부는 환각처럼, 커피 향으로 아늑하다. 작품의 울퉁불퉁한 질감의 오브제가 바로 커피가루다.
‘동다송(東茶頌)’이라는 주제만으로 23년간 작업해온 백순실(54)씨가 5년 만에 대작들을 들고 나왔다.
서울 인사동 노화랑에 출품된 최근작 30점에는 그가 즐겨 쓰던 빨강, 파랑의 화끈한 색들이 없어졌다. 유채색과 무채색이 공존했던 지난 작업과 비교했을 때 무채색쪽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졌다. 유채색이 현실의 반영이라면 무채색은 기억의 반영이다.
“부쩍 지나간 시간을 생각할 때가 많아요. 내면의 변화입니다. 단순해지고 깊어졌어요.” 그에게 있어서 그림은 마음을 비우는 작업이다. 차를 마시면서 마음을 다스리듯.
아버지로부터 차는 바른 자세로 덕담을 하면서 마셔야 한다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듣고 자란 그는 서른 즈음의 어느날 차에 대한 모든 것이 알고 싶었다고 했다. 차 이야기가 담긴 책들은 모조리 읽었고 그 중 초의 스님이 쓴 동다송에 나오는 몇 구절이 특히 마음에 와 닿았다.
“초의는 차의 성품이 사특함이 없어 어떠한 욕심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고, 때묻지 않은 본래 청정한 우리들의 마음자리와도 같은 것이라고 얘기했어요. 결국 도(道)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잔의 차를 마시는 일상 주변에 있다는 뜻이지요.”
작업 주제가 ‘동다송’이 된 것이 그 때부터다. 그래서 울림과 여운이 큰 그의 그림에서는 진하게 우려낸 차 맛이 느껴진다. 만추(晩秋)에, 그림 속 그윽한 다향에 취해 오래 전 잃어버렸던 기억들을 되살려 음미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15일까지. (02)732-3558
조윤정기자 yj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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