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과이 출신 언론인이며 작가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불의 기억’이 고대부터 현대까지 남미의 역사를 다룬 책이라는 건 무척 새롭고, 한편으로 놀랍다.
딱딱한 사서(史書)의 속박에서 역사를 해방시키기 위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의 숨결을 (자의적이긴 하지만) 생생하게 복원하기 위해 갈레아노는 매우 문학적인 방식을 채택했다.
문자가 없던 시기의 신화 시대에서 시작해 1980년대 중반까지 남미의 역사를 연대기 형식이지만, 인과관계가 없는 일화에서 일화로 이어진다. 길어야 원고지 너덧 장을 넘지 않는 일화들은 각각이 독립적이며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독특한 방식을 취한 데는, 남미의 역사는 잘 짜낸 인과관계의 연속이 아니라 동시 다발인 여러 사건의 집합이며 일관된 공식의 역사는 허구임을 보여주려는 저자의 의도도 한 몫 하고 있다.
저자는 이런 형식 속에 갈레아노의 식민군대에 불타버린 마을을 바라보는 원주민 여인과 품안의 갓난아기, 군사정권의 고문자들에게 겁탈 당한 여인의 고백을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주교 등 이른바 역사의 ‘하위주체’들의 목소리를 되살려낸다. 이 책을 장대한 서사시라고 부르는 것이 결코 과분하지 않다.
김범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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