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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고려대의료원/ 보람찼던 파키스탄 의료활동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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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고려대의료원/ 보람찼던 파키스탄 의료활동 9일

입력
2005.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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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티헤(아프세요)? 인 테잘 카로(잠시만 기다리세요).”

천막 휘장을 걷어올리기가 무섭다. 순례자의 행렬처럼 줄은 벌써 까마득하다. 2일 오전 9시(한국시각 오후 1시) 파키스탄 북부의 허브병원인 아보타바드의 아유브종합병원 앞마당은 인산인해였다. 그곳엔 한국일보사와 고려대의료원(의무부총장 홍승길)이 지난달 29일 함께 세운 ‘아름다운 병원 2호’가 있다.

곁엔 대한의사협회가 파견한 경찰병원 의료단(단장 서동엽 경찰병원 진료1부장)이 지난달 31일부터 야외병원을 열어 환자를 맞고 있다.

2개의 한국병원은 매일 각각 300여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고 있다. 주차장이던 병원 앞마당이 ‘한국 인술(仁術)의 메카’로 변모한 셈이다.

정작 아유브병원에는 앰뷸런스에 실려오는 응급환자를 빼곤 손님이 거의 없다. 주민들이 1,200병상을 갖춘 번듯한 종합병원을 마다하고 말도 안 통하는 이방인의 궁색한 야외병원을 찾는 까닭이 있다. 돈은 아니다. 아유브병원 역시 의료봉사단처럼 무료진료를 하기 때문이다.

답은 정성과 사랑이다. 의사는 환자가 알아보는 법이다. 단골환자 악바르(25)씨는 “한국 의사들은 정성껏 붕대를 감아주고, 약도 꼼꼼하게 잘 챙겨주며, 무엇보다 친절하다”면서 “한마디로 ‘원더풀’”이라고 외쳤다.

‘아름다운 병원 2호’ 의료진은 휴일도 거른 채 제몸 아끼지 않고 진료에 매진하고 있다. 김시완(고대안암병원 가정의학과) 전공의는 “몹쓸 상처에 시달리는 맑은 눈망울의 아이와 수년 전 질환까지 자잘하게 털어놓는 순박한 환자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힘이 난다”고 말했다.

의료서비스의 질 차이도 난다. 현지 의사와 함께 외과수술을 집도한 허준용(고대구로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가장 청결해야 할 수술실에 쓰레기가 쌓여있고 악취가 난다”며 “더 좋은 의료혜택을 바라는 마음은 한국이나 여기나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현지병원에서 제대로 치료 받지 못한 환자가 ‘아름다운 병원 2호’를 찾는 일도 종종 생겼다. 오른쪽 눈이 퉁퉁 부은 카스(8)는 ‘안과 진료를 받으라’는 현지병원의 처방전을 들고 헤매다가 고열에 시달리는 등 상태가 악화했다. 지난달 31일 고려대 의료진으로부터 간단한 수술로 받고 나서야 호전됐다.

뿐만 아니다. 주택의 90%가 무너지는 등 지진 피해가 극심했던 발라코트에는 지난달 중순부터 한국 의료진이 차례차례 ‘사랑의 인술 릴레이’를 펼쳤다.

지난달 27일 개원한 한국일보사와 고려대의료원의 ‘아름다운 병원 1호’를 비롯해 그린닥터스, 굿네이버스, 대한불교 조계종, 경찰병원 등이 임시병원을 냈다. 인류애를 실천하는 한국 의사들 덕분에 ‘코리아’라는 국명이 차츰 현지인의 입에 붙고 있다.

하지만 정 들만하면 이별이 찾아오는 게 세상이치다. 머나먼 무슬림의 땅에서 명실공히 단골병원으로 자리매김한 ‘아름다운 병원 1ㆍ2호’는 2일 오후 5시(한국시각 오후 9시) 9일 동안의 의료활동을 마무리했다. 돌본 환자의 숫자는 3,500여명에 이른다. 그 중 40%는 아이들이었다.

주민들은 의료진에게 일일이 악수를 청하며 석별의 정을 나눴다. ‘코리아 닥터’에 대한 소문을 뒤늦게 듣고 멀리 만세라에서 왔다가 그냥 돌아가는 안타까운 사연도 있었다.

경찰관 아비드 알리(20)씨는 “마음 같아선 당신들을 오래오래 붙잡아 두고 싶다. 지진 피해자뿐 아니라 파키스탄 전체가 잊지 못할 은혜를 입었다”며 경의의 표시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이날 오후 하늘도 헤어짐이 아쉬웠는지 비를 뿌렸다. 21인의 의료봉사단은 4일 오전 귀국했다.

아보타바드ㆍ발라코트(파키스탄)=고찬유기자 jutdae@hk.co.kr

■ 간호사들의 진료 일기

앉을 틈도 없다. 말도 통하지 않는다. 체온과 혈압을 재고 소독을 하고 붕대를 감고 주사를 놓는다. 매일 10시간의 일과를 마치면 몸은 녹초다.

그래도 ‘의료봉사의 꽃’인 간호사들은 졸린 눈을 비벼가며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썼다. 누구보다 더 파키스탄 대지진 피해지역 환자들과 가까이 있었던 고려대의료원 간호사 6명의 진료일기를 소개한다.

#10월28일(이효경ㆍ고대안암병원 소화기내과)

‘지진 때문에 반 친구 20명이 모두 죽었다고 했다. 녀석은 혼자 살아 남았다. 꼬마는 왼손을 구부리지 못한다. 상처는 낫겠지만 그날의 악몽은 계속 떠오르겠지. 꼬마가 살아가야 할 날들이 까마득하다. 말이 통했다면 위로라도 실컷 해줄 수 있으련만. 주사만 놓아줬다. 아쉽고 미안하다. 건물이 모두 무너졌는데 이곳 사람들은 순박하기만 하다. 그 평화가 놀랍다.’

#10월29일(김진연ㆍ고대안암병원 중환자실)

‘중년여성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다. 이곳에선 혼자 사는 여자를 괄시한다고 했다. 먹을 것도 없고 잘 곳도 없다고 했다. 증상은 불면증과 소화불량. 처방해줄 약이 없었다. 함께 눈물 흘려주고 토닥거려줬다. 무기력하다. 지진피해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우린 무관심하다. 돌아가면 잊지 말라고 얘기해줘야지.’

#10월30일(김혜영ㆍ고대구로병원 수술실)

‘(아유브종합병원의) 수술실은 너무 지저분했다. 그곳에서 한 여성의 가슴 피부이식 수술을 했다. 허벅지 위의 살(서혜부)을 떼서 이식했다. 수술은 잘됐다. 하지만 위생상태가 좋지 않아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걱정이다. 이들을 남겨두고 떠나는 게 미안하다.’

#10월31일(설근혜ㆍ고대안암병원 성형외과)

‘누르흐만씨는 생후 2개월짜리 아기를 업고 3시간(실제론 5시간)이나 험난한 산길을 내려왔다. 아기는 엄마를 잃었다. 아빠 홀로 아기를 키워야 한다. 몸짓과 간단한 기호로 분유 타는 법을 알려줬다. 보채는 아기보다 눈물이 고인 아빠의 눈동자가 더 슬프다.’

성명숙(고대구로병원), 김은주(고대안산병원) 간호사도 ‘환자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고 썼다.

이번 의료봉사에는 여성 약사 3명이 콱 막힌 텐트 안에서 묵묵히 수천 봉지의 약을 조제했다. 강호영(고대안산병원), 진수미(고대구로병원), 강영미(고대안암병원) 약사 등은 “수작업을 해야 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먹일 가루약을 만드는 데 애를 먹었고, 환자들이 라마단 기간이라 점심 때 약을 안 먹으려고 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발라코트=고찬유기자

■ 김승주 파키스탄 의료봉사단 단장 인터뷰

“한 사람이라도 더 치료하기 위해 의료진을 다독였습니다.”

단장은 그저 직함일 뿐이다. ‘파키스탄 재해지역 의료봉사단’ 김승주(고대안산병원 외과 교수) 단장은 분위기메이커에 가깝다.

최신 트롯 한 가락을 뽑는가 하면 구수한 재담을 풀어놓는다. 고된 일과에 심신이 지친 단원들에게 김 단장은 아늑한 휴식처이자 털털한 옆집 아저씨다. 진료 역시 열심이다.

9일간의 파키스탄 의료활동을 진두지휘한 김 단장의 얘기를 들어봤다.

-어떤 성과가 있었나.

“초기에 간단한 처치만으로 완치될 수 있는 환자가 많았다. 그런데 차츰 병을 키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진료는 정성껏, 의약품은 아낌없이 나눠줬다. 100% 만족은 아니다. 다만 작은 도움이 그들에게 희망의 씨앗이 되길 바란다.”

-힘들었던 점은.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에 만성질환자가 많았다. 여력이 있다면 더 돕고 싶지만 주거 및 생활환경은 약 몇 봉지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하루빨리 공공시설이 복구돼야 한다.”

-활동 소감은?

“고려대의료원의 비전 중엔 ‘나눔과 봉사의 정신’이 있다. 그래서 자원했다. 어려운 여건에서 최선을 다해준 단원들에게 고맙다. 파키스탄 정부에도 감사한다.

중국은 군의관 50명이 X_레이 기계까지 갖춘 이동병원을 운영했다. 우리도 국가차원의 의료지원활동 시스템을 고민해야 할 때다.”

■ 고려대의료원, 현지병원에 1억상당 의약품 기증

고려대의료원이 2일 오후 파키스탄 아유브종합병원 현관에서 사랑의 의약품 기증식을 가졌다.

이날 행사에는 김승주 단장을 비롯한 ‘파키스탄 재해지역 의료봉사단’과 아유브종합병원 자페르 후세인 원장 등 병원 관계자가 참석했다. 기증품은 모두 1억원 상당으로 항생제 진통소염제 주사제 등 의약품과 청진기 혈압기 클러치 등의 의료기재다.

아유브병원은 파키스탄 북부의 최대 허브병원이지만 지난달 8일 대지진으로 병원 담장이 무너지고 건물에 금이 가는 등 피해를 입었다. 이 때문에 침상과 의료시설을 모두 밖으로 빼내야 했다.

지난달 24일 병원 건물이 안전하다는 최종진단을 받았지만 아직 가동률은 40% 수준이다. 더구나 환자들이 몰리면서 의약품도 턱없이 부족하다.

자페르 원장은 “의료활동뿐 아니라 귀한 의약품까지 선물해줘서 고맙다”고 답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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