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소르망은 유난히 한국에서 인기 있는 프랑스 사람이다. ‘미국의 보수혁명’ ‘Made in USA’ 등의 저서를 통해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를 적극적으로 옹호해 온 그는 프랑스 내에서는 소수의 우파 이데올로그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에서 그의 이름 앞에는 으레 ‘세계적 석학’ ‘프랑스의 지성’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가 또 한국을 방문했다. 지난달 28일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기념으로 열린 ‘미래는 문화와 경제’라는 국제심포지엄에 발표자로 초청된 것이다.
그런데 기 소르망이 이번에는 한국의 네티즌들로부터 호되게 당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심포지엄에서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모든 문화재는 돌고 도는 것, 19세기 제국주의자들이 문화재를 잘 보존했기 때문에 그 공로도 인정해야 한다”는 요지의 말을 한 것이 보도되자 인터넷에서 네티즌들의 “어이없고 황당한 궤변”이라는 비판이 잇따르는 통에 때아니게 ‘기 소르망’이 인기 검색어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기 소르망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가 국립중앙박물관 심포지엄에서 “한국문화가 4가지 얼굴을 갖고 있다”고 발언했다는 점이 떠올라서다. 기 소르망은 한국의 얼굴 1이 공동체ㆍ계급간의 단합이라고 했다. 얼굴 2는 개인적인 생산체계, 3은 북한, 4는 이민세대라며 이 4가지가 갈등 없이 풀려야만 미래지향적인 세계화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2일 치러진 방폐장 부지 선정을 위한 주민투표의 결과와 그 과정을 돌아보면서 기 소르망이 말한 한국의 얼굴 1 공동체ㆍ계급간의 단합이 떠오른 것은 왜 일까.
계급간의 단합은 차치하고 그가 ‘공동체의 단합’이라고 표현한 현상 중 가장 뚜렷한 것이 우리 현실에서는 지역감정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표현은 ‘단합’이라고 했지만 그것을 풀어야 할 갈등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기 소르망도 이 ‘단합’을 문제로 인식한 듯하다.
국책사업 결정에 해당지역 주민의 직접적 의사를 반영하는 주민투표라는 민주주의 절차를 처음으로 도입한 이번 방폐장 부지 선정 과정에서도 지역감정은 어김없이 등장했다.
“겉만 번지르르한 문화도시지, 우리가 수학여행 오는 학생들 아니면 뭘로 먹고 사느냐”며 방폐장 유치운동을 전개했던 경북 경주시는 기실 초반에는 전북 군산시에 밀리는 듯했다. 그 열세를 뒤집은 것은 오히려 경쟁상대인 군산시에서 들고 나온 지역감정이었다.
투표를 열흘여 앞두고 군산시내에 등장한 ‘배 터진 경상도 지금도 배고프냐? 방폐장 양보해라’ ‘똘똘 뭉쳐 경상도 대통령 뽑아주었더니 역시 군산을 버리는군요’ 등의 현수막은 곧 바로 경주지역 지방신문에 사진으로 도배됐다.
경주시장은 삭발에 단식하는 구태를 재현했고, 내심 방폐장에 거부감을 가지던 경주시민들도 울고 싶은데 뺨 때려 준다고 이 지역감정 때문에 찬성투표로 마음을 돌렸다. 대략 이것이 이번 투표 결과에 대한 현장의 분석이다.
하지만 방폐장 뿐 아니라 근간의 태권도공원, 동계올림픽 후보지 등의 선정 과정에서도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이런 지역감정은 출몰했다.
전북지사가 주민투표 후 “투표 결과를 받아들이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 영호남 갈등 증폭을 해소하는 길이고 전북도민다운 자세”라며 “지역간 갈등을 성숙한 시민의식을 통해 극복하자”고 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워 보인다.
올해는 지방자치 10년이다. 지역감정의 뿌리가 더 깊다고 하지만 더 이상 기 소르망 같은 국외자가 그것을 한국의 얼굴 1로 꼽아서는 정말 낯 부끄러운 일이다.
하종오 사회부차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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