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회색의 계절이다. 두부 자르듯 계절을 구분하기 힘든 탓이다. 여전히 가을인가 싶다가도 새벽 공기를 가르는 코끝 찡한 매서운 바람을 맞노라면 겨울이 머지 않았음을 느낀다. 굳이 말하자면 겨울 언저리라고 할까.
도시는 아직 단풍을 보내지 않았지만 산 정상에는 이미 하얀 겨울이 시작됐다. 설악산과 한라산의 눈 소식은 이미 뉴스 거리도 아니다. 게다가 눈이 오지 않아도 흰 세상을 보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상고대 덕분이다. 눈꽃의 일종으로 알려진 상고대는 눈이 아닌 서리이다. 산 정상의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면 서리가 녹지 않고 나무나 돌에 얼어 붙어 눈꽃 행세를 한다. (상고대란 순 우리말이다. 상응하는 한자어로는 수상(樹霜)이 있다).
발품을 많이 들이지 않고 상고대를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무주의 덕유산과 평창의 발왕산이다. 무주리조트와 용평리조트를 품은 산이다. 대규모 스키장이 들어서면서 산림이 훼손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게으른 산행가에게는 더 없는 편안함을 안겨 주었다. 정상 문턱까지 운행하는 곤도라 덕택이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진 지난 주말 덕유산을 찾았다. 설천봉(1,520m)까지 운행하는 곤돌라앞은 이미 인산인해. 쉽게 단풍을 완상하려는, 이를테면 얌체 산행가들이다. 그 행렬에 살짝 끼었다.
절정의 단풍. 곤돌라 속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는 덕유산은 홍엽의 바다. 20분도 되지 않아 또 다른 세상과 마주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설천봉에 도착한 곤돌라의 문이 열렸다. 순간 옅은 안개가 온 몸을 감싼다. 한기가 느껴진다. 밖을 나서는 관광객들이 ‘악’하는 비명을 지른다. 온 산을 뒤덮은 상고대가 혼을 빼놓는다. 순백이 지배하는 곳으로의 공간 이동을 한 느낌이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간다는 주목나무에 핀 상고대가 바람에 털려 후두둑 하고 떨어진다. 얇디 얇은 물방울로 화한 상고대는 아침 햇살에 짧지만 영롱한 빛을 뿜더니 대기속으로 승화한다.
설천봉에서 정상인 향적봉으로 향한다. 등산로가 잘 나있어 20분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단풍을 즐기러 온 관광객들이 뜻하지 않게 만난 행운을 만끽하느라 얼굴마다 웃음꽃이 피었다. 너무 많은 인파로 교통 체증을 빚을 지경이지만, 그마저 즐겁다.
웃음이 지속되는 시간은 길지 않다. 햇살이 내리쬐면 빨리 사라지는 것이 상고대의 특성인 탓이다. 바람이 가세, 가지에 붙은 상고대를 훑어내니 관광객들의 탄성은 이내 탄식으로 바뀐다. 순백의 농도가 희미해지는 것이 안타까워, 정상으로 가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향적봉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가히 환상적이다. 중봉으로 가는 길은 아직 초록 기운이 가시지 않은 잔디와 상고대가 만들어 놓은 색의 대비가 뚜렷하다. 설천봉을 내려다 보니 상고대와 단풍이 색채 향연을 빚어낸다. 흔하게 볼 수 없는 풍경화이지만, 그 풍광이 오래 지속될 수 없어 더욱 애틋하다.
순간 ‘홱’ 하고 한 줄기 바람이 스치니 상고대를 잔뜩 머금은 주목나주 가지는 세월의 고단함을 털어내 듯 이슬 방울을 흩날린다. 그 찬란한 아름다움이 가슴속에 오롯이 새겨진다.
덕유산(무주)=글ㆍ사진 한창만기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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