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닉슨 정권 하에서 미군의 참담한 베트남 철수를 이끌었던 멜빈 레어드 당시 국방장관(83ㆍ1969~73년)이 30여년의 긴 침묵을 깨고 이라크에서 허우적거리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출구전략의 교훈을 남겼다. 그는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즈’최신호(11·12월호)의 장문의 기고문에서 “이라크, 베트남의 교훈을 배워라”고 썼다.
레어드 전 장관이 제시한 출구전략의 요점은 두 가지다. 이라크에 물적 지원을 충분히 하라는 것과 이라크전을 ‘미군의 전쟁’이 아닌 ‘이라크인의 전쟁’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글에는 미국이 패한 유일한 전쟁의 군 최고 지도자였다는 오명을 뒤로 하고 이라크가 또 다른 베트남이 돼서는 안 된다는 충정과 고언이 배어 있다.
그에게 베트남전 패배는 전장이 아닌 의회에서 비롯됐다. 전쟁 막바지까지 베트남군은 곳곳에서 승전보를 올렸다.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 미 의회의 지원 중단이었다.
레어드는 “미군의 베트남에서의 수치는 전쟁에 발을 담근 게 아니라 동맹국 베트남을 막판에 배신한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남쪽 사이공 정권에 등을 돌리자 북쪽의 호치민 정권은 미국을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교활한 나라’로 선전하면서 전의를 불살랐다.
레어드는 의회의 한 친구로부터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최근 의회를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졌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의회를 설득하지 못한 결과가 베트남전 패배라는 참담한 현실을 낳았다고 생각하는 그는 국방장관은, 더욱이 전쟁 중인 국방장관은 항상 의회에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의원보다 못나서가 아니라 전쟁터에서 희생되는 군인과 군인의 가족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을 ‘베트남화’못한 것은 두번째 실책이다. 미국은 베트남 정권을 제쳐두고 모든 것을 다하려고 했다. 전쟁을 직접 수행해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겠다는 명분이었지만, 그것은 베트남 국민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레어드는 이라크 방위군을 하루빨리 키워 미군을 대체하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라크군이 100% 준비될 때까지, 또는 이라크의 민주주의가 확고해질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한 사람의 이라크군이 준비되면 한 사람의 미군을 철수하는 식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레어드는 부시 대통령에게 한가지 위안의 말을 던졌다. 잘못된 정보, 잘못된 판단으로 섣불리 개전한 것은 베트남전이나 이라크전이나 똑같지만, 그렇다고 전쟁을 여기서 끝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1991년 ‘사막의 폭풍’ 작전을 바그다드까지 끌고 가 그 때 사담 후세인 정권을 전복했다면…. 은연중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지금 업보는 부시 대통령만이 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황유석 기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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