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 8월 ‘이건희 시대’라는 책을 냈다. 삼성과 이건희 회장을 중간적 입장에서 양시양비론으로 다룬 책이다. 양 극단의 지지세력과 비판세력 사이의 소통을 선동함으로써 다수의 지지를 받으면서 확실하게 실천 가능한 개혁을 이루자는 마음에서 썼다.
그러나 그 책을 쓰고 나서 주변에서 욕을 꽤 먹었다. 이른바 ‘도청 X파일 사건’으로 이 회장과 삼성이 그간 저지른 불법과 횡포를 응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그런 분위기를 망칠 수 있다는 이유였다. 대충 이런 대화가 오고 갔다.
●잘못된 신호 보낸 사회도 책임
“아니 내 책은 그 사건 이전에 쓰인 것인데다, 나는 모든 걸 법대로 처리하는 데에 찬성하는 사람이고 그 책도 그런 기조 위에 서 있는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이 회장과 삼성에 대한 응징이 ‘법대로’ 가능하다고 믿는가? 불 같은 분노의 여론이 일어 검찰과 사법부에 압박을 가하지 않고선 그들은 영원한 성역이라는 걸 모르는가? 그런데 당신의 책은 타오르는 불길에 찬물을 끼얹는 효과를 낼 수 있으니 어찌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요컨대, 한국은 불처럼 타오르는 여론의 힘을 빌리지 않고선 법치(法治)의 완전한 실현을 기대하기 어려운 나라라는 것이다. 따라서 타야 할 불이 타오를 때엔 기름 한 방울이라도 보태야지 찬물을 붓는 성격의 발언은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에 일리가 없지 않음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우리 사회가 그간 이 회장과 삼성에 잘못된 신호를 보내왔다는 점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즉, 이 회장과 삼성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행위들을 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믿게 한 책임이 우리 사회에도 있다는 것이다.
이 회장과 삼성 비판 중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그들이 돈질을 해서 사회 각계를 장악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장악을 당하는 이들은 누군가? 힘없고 배운 게 없는 이들인가? 아니다. 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힘 있고 많이 배운 권력ㆍ엘리트 집단들이다.
평소에 그걸 몰랐나? 평소 알고 있던 사실이라고 한다. 무슨 대책은 세웠나? 무대책이었거나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한국사회의 수준을 일시에 뛰어넘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오기만 기다렸었나 보다.
한국을 대표할 만한 유명 지식인들이 앞 다투어 일방적인 ‘이건희 예찬론’을 폈을 때, 그 어떤 반론도 나오질 않았다. 오래전부터 삼성을 비롯하여 재벌들이 주는 각종 금전적 지원 혜택을 받기 위해 지식인들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이건 아예 논의의 대상이 되질 않는다.
대학의 영웅은 이 회장과 삼성이다. 이 회장과 삼성으로부터 많은 돈을 받은 명문대학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 또한 전혀 거론되지 않는다. 고작 이 회장에게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주는 것만 논란이 될 뿐이다.
●한 사람에게 다 떠넘기면 될까
지금 나는 “우리 모두 죄인이요”라는 식의 대책 없는 탄식을 하자고 역설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평소 행태를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 일도 같이 해보자는 것이다.
내 주장은 이 회장과 삼성이 한국사회를 얕잡아 볼 만했다는 것이다. 그런 신호를 보내는 데엔 이 나라 지성의 보루라는 대학과 지식인들이 앞장섰다. 자기희생적인 헌신으로 이 회장과 삼성의 문제를 고발해온 극소수 인사들을 제외하곤 모두 ‘삼성공화국’ 체제에 안주해 온 것이다.
바로 이런 ‘평소 실력’에 대한 아무런 성찰도 없이 ‘벼락공부’하는 식으로 이 회장과 삼성에만 돌을 던지는 것은 위선이다. 공동책임을 져야 할 일에 주범을 하나 지목해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다른 모든 사람은 면책될 뿐만 아니라 피해자인 양 오히려 큰소리치는 풍토도 개혁 대상이 되어야 한다.
전북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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