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37) 순진한 과장과 섬세한 유혹-뮤즈와 스웨이드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37) 순진한 과장과 섬세한 유혹-뮤즈와 스웨이드

입력
2005.10.31 00:00
0 0

뮤즈(Muse)는 2, 3년 전부터 우리나라 음악 팬들 사이에서도 열혈마니아가 생겨난 영국밴드이다. 이들의 첫 앨범 ‘Showbiz’(1999)와 두 번째 앨범‘Origin Of Symmetry’(2001)는 공히 바로크 풍의 건반이 현란하게 몰아치는 사운드로 시작한다. 미니멀하고 심플한 것이 소위 쿨한 것으로 통용되는 요즘 트렌드를 생각하면 가히 시대착오적이다 싶을 정도다.

과잉된 감정을 절제 없이 내뱉는 매튜 벨라미의 보컬을 듣고는 ‘이거 완전 신파로군’ 했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뮤즈의 그런 통속적인 화려함이 싫지 않았었다. ‘Dark Shines’의 기타 솔로 부분은 숫제 캬바레에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무드였지만, 그것 역시 독특한 정감이 느껴져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럼에도 뭔가 기술적 재능 이상의 것이 잡히지 않는다는 느낌이어서 객관적인 ‘공신력’보다는 주관적이고도 편협한 ‘설득력’으로 어필하는 밴드로 여겼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3집 ‘Absolution’(2003)을 듣고 나서도 변함없었다.

그 무렵, 생일날 예기치 못한 사람들에게서 스웨이드(Suede)의 싱글 베스트 앨범을 선물 받았다. 그때, ‘언제적 스웨이드냐?’며 혼자 중얼거렸는데, 내게서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게 하도 생경해 기억을 더듬었더니 내가 스웨이드를 마지막으로 들었던 게 족히 7, 8년은 넘었겠다 싶었다.

브렛 앤더슨의 비음을 장난스레 흉내 내면서 웬만한 노래방 레퍼토리를 모두 ‘스웨이드화(化)’하며 까불고 놀던 시절에서 그 만큼 멀리 왔구나 하는 상념이 들면서 생일이라는 게 무척 서글프게 여겨졌다.

그러나 오해는 마시라. 지금은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그 추억 얘기를 하자는 건 아니니까. 다만 예상도 못한 스웨이드와의 ‘재회’가 무척 반가웠다고만 말하고 싶을 뿐이다.

뮤즈와 스웨이드를 동시에 언급하면서 그들의 음악적 차이나 성과에 대해 왈가왈부하자는 건 아니다. 영국 출신이고, 멜랑콜리한 정조를 바탕으로 한 자멸적인 사운드를 화려하게 구사한다는 식으로 데이터를 공유시켜도 그리 억지스럽지 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스웨이드가 거의 맛 간(?) 무렵에 뮤즈의 정식데뷔앨범이 발표됐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 둘을 일대일로 비교하는 건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단지 최근에 그들의 음악을 다시 들으며 떠오르는 어떤 상념들이 얘깃거리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소위 ‘오버’에 대해서다.

뮤즈의 요란한 과잉과 스웨이드의 교태에 가까운 오버를 동시에 좋아할 사람도 없진 않겠지만, 뮤즈에 비하면 스웨이드는 특유의 패셔너블한 화려함을 유지하면서도 뮤즈의 좌충우돌하는 감정 과잉 보다는 훨씬 안정된 느낌이다.

버브(The Verve)의 ‘Bitter Sweet Symphony’등과 함께 90년대 브릿팝의 송가로 손꼽히는 ‘We Are The Pigs’나 댄서블한 느낌의 히트싱글 ‘Beautiful Ones’를 뮤즈가 부른다고 가정해 보면 이런 단순대비는 보다 명확해질지 모른다.

뮤즈는 도무지 자제란 걸 모르는 밴드다. 그게 바로 뮤즈의 매력이자 장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래서 생겨난 중독성은 그리 약발이 오래 가지 않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 뮤즈의 과잉은 과잉 자체에 대한 강박으로 여겨질 만큼 집요하다.

그래서 쉽게 질린다. 일말의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몰아치는 ‘Stockholm Syndrome’같은 곡은 헤비메탈의 코드 진행과 연주기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그 위에 끼얹어지는 매튜 벨라미 특유의 흐느낌은 물샐 틈 없이 단단하게 쌓아올린 벽에 색색의 페인트를 한껏 발라놓은 듯한 느낌이다.

뮤즈는 슬퍼해라, 울어라, 너의 분노를 울부짖음으로 뱉어라, 라고 대문짝만하게 시위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요란한 감정의 전시가 내 것 인 양 전이되는 어느 한 순간, 뮤즈는 매혹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뮤즈는 지리멸렬하다.

내게 뮤즈는 위태로운 불안감 자체를 희열로 받아들이길 강요하는 고집 센 줄타기 곡예사(실제로 뮤즈의 공연은 기타에서 키보드로, 키보드에서 보컬로 제멋대로 오가는 리더 매튜 벨라미의 아크로배틱 퍼포먼스에 다름 아니다)를 연상시킨다.

다시 말하면 음악이 자극하거나 형성한 특유의 분위기 속으로 자연스럽게 빨아들인다기 보다는 리스너의 입장에서 임의로 조장된 모종의 감정적 상태가 마련됐을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와 박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요란하고 다채로운 사운드의 핵심에 오로지 슬픔과 분노라는 막연한 정서적 동인밖에 없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바로 그 알 수 없는 절망(외지의 인터뷰를 훑어보면 매튜 벨라미는 자신의 음악에 대해 유독 ‘솔직함’을 강조한다)이 그토록 화려한 형태로 분출됐다고 봐도 틀리진 않겠지만, 어느 순간 ‘또 그거야?’싶은 느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뮤즈는 한번에 다 가버려 더 볼 것 없어지게 만드는 자충수가 극에 달한 느낌이다.

스웨이드는 19세기말의 데카당스를 데이비드 보위의 ‘우주괴물’ 아이콘에 덧씌워 소위 20세기말의 암울함과 병적 탐닉을 노래한 것으로 유명하다. 뮤즈가 라디오헤드의 ‘The Bends’ 앨범과 너바나의 혼성교배로 탄생했다면 스웨이드는 데이비드 보위의 스타일에 랭보의 감성을 주입시킨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정리는 초기의 기타리스트 버나드 버틀러가 중도 이탈한 채 완성한 2집 ‘Dog Man Star’(1994)까지로 한정되는 부분이 많다. 팝튠이 강조되기 시작한 ‘Coming Up’(1996) 이후의 앨범들은 스웨이드 특유의 끈적끈적한 에로티시즘이 많이 상쇄됐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싱글 베스트앨범의 곡 배치가 재미있다.

3집의 히트 싱글 ‘Beautiful Ones’로 시작되는 이 앨범은 그들의 역대 싱글들이 뒤죽박죽으로 섞여있다. 80년대의 빅 스타 듀란듀란(스웨이드와 맥락이 전혀 안 닿는 것도 아닌 것 같다)이 연상될 정도로 경쾌하고 밝은 ‘Attitude’와 ‘Electricity’ 다음에 묵직하고 우울한 초기 명곡 ‘We Are The Pigs’가 흘러나오는 식이다.

마치 반쯤 가려진 커튼으로 빛과 어둠을 조절하며 자신들의 변천사를 재편집해 들려주는 듯한 느낌이다.

희대의 방탕아에서 불현듯 어린 시절을 절단 내며 아프리카로 떠난 랭보의 행적과도 닮았다고 말하면 그야말로 오버겠지만(브렛 앤더슨은 요즘 동양철학에 빠졌다고 한다), 뮤즈의 ‘초과잉 센서티브 멀티 사운드’(?)를 듣고 난 탓인지 이들의 사려 깊은 완급조절이 무척이나 중후하게 여겨진다.

성대 이상으로 특유의 코맹맹이 소리가 두텁게 가라앉은 브렛 앤더슨의 변화가 단지 우연한 사고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만큼 이 앨범은 스웨이드만의 개성과 장점을 말끔하게 요약정리하면서 또 다른 사운드를 기대하게 만든다.

만약 브렛 앤더슨이 솔로로 나선다면 닉 케이브나 톰 웨이츠 풍으로 일신한 싱어송라이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내 멋대로의 바람을 한번 제시해본다.

원래 비음을 많이 쓰다보면 성대 피로가 과해져 엽기적인 허스키보이스로 표변하기도 하니까. 어쨌거나 다시 듣게 된 스웨이드는 자신들의 후배 뮤즈에게 오버의 참맛을 한 수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스웨이드는 조금씩 임팩트 강하게 보여주면서 부드럽게 끌어들이는 유혹의 법칙을 이미 체득한 듯 보인다.

그런 저런 이유로 뮤즈에게서 느끼는 가장 아쉬운 요소는 유머가 아닐까 싶다. 유머는 거리에서 발생하고, 슬픔을 중화시킨 감성에서 자연스럽게 발산된다. 오죽하면 우디 앨런은 ‘희극은 비극 플러스 시간’이라 말했겠는가. 그런 유머는 개그도 슬랩스틱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웃기려 드는 의도가 전혀 없이 생겨나는 ‘허한 웃음’이다(그런 의미에서 유머의 진정성이 썰렁함에 있다고 말하면 이것도 오버일까?). 살면서 감정적으로 오버하는 것이 그 자체로 코미디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듯, 일방적으로 내지르는 것에 과잉투여되는 뮤즈의 나르시시즘은 슬랩스틱에 가깝다.

때문에 그들의 노래를 듣다가 부지불식 생겨나는 뜨악함이 요령부득하다. 만약 자신의 격한 감정에 감화하는 듯한 사람이 돌연 생뚱맞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음악에 대해 개인적으로 강한 관심을 갖고 있는 내가 우연찮게도 비슷한 시기에 다시 접하게 된 스웨이드의 노래를 통해 결론 내린 마지막 한 마디는 이거다.

“그 모든 것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똑같은 건 아니다. 당신은 수면에 비친 그림자가 아니라 수면에 물결을 일으키는 물고기일지도 모른다.”(미우라 켄타로우의 만화 ‘베르세르크’에서)

웬 꼴같잖은 훈수냐고? 아니다. 전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사는 동년배의 호의의 표현일 뿐이다.

시인 nietz4@naver.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