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랄프 깁슨, 인간 내면을 꿰뚫어 무의식을 찍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랄프 깁슨, 인간 내면을 꿰뚫어 무의식을 찍다

입력
2005.10.30 00:00
0 0

랄프 깁슨의 사진을 보는 것은 상당히 불편한 경험이다. 그의 사진은 관객을 혼돈에 빠뜨린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한 남자가 기타를 치고있고 옆에는 아기 바구니가 놓여있다. 아기는 보이지않은 채 한쪽 손만 뻗어 올렸다.

이 장면이 암시하는 바는 뭔가? 아기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 아기는 기타선율에 맞춰 손장단을 맞추고 있는가, 아니면 절실하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가? 남자는 아기에게 달콤한 자장가를 불러주고 있는가, 아니면 음악에 취해 맹렬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아이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건가? 혹시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인가?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해답은 어디에도 없다. 초현실주의 사진의 세계적 거장 랄프 깁슨은 다만 이 모호하고 기이한 세계, 혼돈의 순간을 냉정하게 제시하면서 우리가 익히 알고있다고 믿는 일상을 낯설게 만든다. 세계란 그렇게 확실하고 이해 가능한 범주가 아니다. ‘냉정한’ 일탈, ‘엄격한’ 파격, ‘정제된’ 꿈의 세계, ‘절제된’ 에로티시즘처럼 모순어법이 지배하는 불가해한 세상. 어쩌면 그는 사진을 통해 인간 무의식 깊숙이 숨겨져 있는 불온한 욕망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선화랑과 선아트센터 공동주최로 11월3일부터 열리는 ‘랄프 깁슨 초대전’은 올해 유난히 많은 사진전 중에서도 특별히 눈길을 끈다. 금년 66세를 맞은 이 작가는 보도사진으로 출발했으나 기록주의적 전통에서 벗어나 사진을 인간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는 언어로 재해석했다. 꿈, 욕망 등 추상적인 주제를 다루되 일탈적인 구도를 통해 이성을 불안하게 만드는 ‘트라우마(traumaㆍ정신적 충격, 외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의 화법이다.

전시에는 사진활동을 막 시작한 1960년대 작품부터 2000년대 들어 작업한 컬러사진까지 반세기에 걸친 대표작 88점이 선보인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흑백사진 3부작’이다. ‘몽유병자(The Somnambulist)’(1970년), ‘데자뷰(Deja-vu)’(1973년), 그리고 ‘바다에서 보낸 나날(Days at Sea)’(1974년)로 이어지는 삼부작은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파격적인 카메라워크가 고전주의적 엄격함과 만나 매혹적인 짝을 이룬, 예술사진의 희귀한 성공작들로 평가된다.

사진집 ‘몽유병자’의 한 장면을 보자. 데이빗 린치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몽환적인 분위기, 삐그덕 하고 열린 문에 누군가의 손이 걸쳐져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갔는지 막 나오려고 하는 것인지 문 저쪽의 상황은 불분명하다. 그러나 힘없이 펼쳐진 손, 문안에서부터 퍼져나와 전체를 휘감은 교교한 조명 빛 등은 평범한 일상을 순식간에 악몽으로 추락시키는, 형언할 수 없이 불안하되 동시에 매혹적인 긴장감을 발산한다.

작가가 70년대 후반부터 집중하고있는 누드작업의 첫 결정체인 사진집 ‘바다에서 보낸 나날’은 과감한 프레이밍과 극단으로 밀어붙인 초현실주의적 상징이 눈길을 끈다.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와 사랑을 나눴다는 레다의 전설에서 영감을 얻은 ‘바다에서 보낸 나날-레다’는 그 대표작이다. 흑백의 강렬한 대비를 통해 여인의 맨 살과 초현실주의자들이 총애했던 (필히 백조였을) 새의 깃털, 그리고 피의 이미지를 담아낸 것으로 터질듯한 긴장감과 성적 에너지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한국에서의 첫 전시회에 맞춰 곧 방한 예정인 랄프 깁슨은 미리 한국 관객에게 보낸 편지에서 “카메라는 나의 엄격한 거울”이라며 “내가 무엇을 보는가, 내가 정말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것이 사진작업”이라고 말했다. 존재의 외부에서 내부로 시선 돌리기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깁슨의 사진작업에서 상당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터. 7일 오후 2시에는 그의 특별강연도 준비돼 있다. 전시는 12월4일까지. (02)734-0458.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